밤이 길고 긴 겨울. 퇴근 시간 무렵 갑작스럽게 내리기 시작한 눈은 회색빛 겨울 도시를 하얗게 잠식해 나아가고 있었다. '금세 그칠 것 같지 않은 함박눈이 쌓이기 전에, 기온이 내려가서 도로가 얼어붙기 전에 안전한 귀가를 하고자 서두르는 사람들이 모두 도로로 쏟아져 나왔고 그로 인해 왕복 8차선의 도로는 자동차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평소 이삼 분 거리의 다리 하나를 건너는 데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다.''“이 부사장, 축하하네. 이제 SG건설이 자네를 얻음으로써 날개를 다는 격이 되었네.”'“감사합니다.”'춥고 어두운 건물 밖의 세상과 무관하게 지금 이곳, 호텔 연회장은 훈훈하다 못해 후끈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는 넓은 실내를 구석구석 환하게 밝히고 있었고, 따뜻한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클래식 음악은 사람들의 미소와 어우러져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었다. 출입문 안쪽으로 들어서기 전에 겨울 외투를 벗어 던진 사람들의 옷차림 또한 춘삼월의 봄바람처럼 가볍고 화사했다.'그런데 가볍고 화사한 것은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오늘 SG그룹 주최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 가볍고 편안한 마음이었다. '초대된 사람 대부분이 임원급들과 그 가족들이었는데 내년에도 자신들이 또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풀어진 마음으로, 혹독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승리감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난 이번에 이 부사장이 사장으로 취임할 줄 알았는데. 사람들 참! 그깟 시선이 뭐라고. 이 부사장,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게. 그 자리가 어디 가겠나.”'SG화학의 주 사장이 눈앞의 젊은 남자와 눈빛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젊은 남자도 굳이 자신을 붙잡고 늘어지는 남자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연회장에 들어설 때부터 자신의 시선을 붙잡고 한 마디라도 더 붙여 보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예의 바른 미소와 시선을 나누어 주었다. '남들이 보기에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젊은 남자에게 저자세이던 주 사장은 스쳐 지나가듯 단 몇 초간 자신에게 머문 젊은 남자의 시선에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고작 몇 초에 불과하지만 범상치 않은 두뇌를 지녔다 평가되는 남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여긴 것이다.'“이 부사장, 여기 있었군.”'김 사장이다. 주 사장과는 달리 SG전자 소속이지만 그룹 내에서 대등한 직위를 가진 사람이다. 두 사람이 애쓰지 않아도 젊은 남자는 그들에 대해 이미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알려 주고자 하는 것보다, 어쩌면 감추고 싶어 할지도 모를 정보까지도 모두 머릿속에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뿐, 젊은 남자는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다. 사실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평소에는 감추고 싶은 본질까지 꿰뚫어 볼 듯한 예리함, 그리고 선뜻 접근이 망설여지는 서늘함과 예의 바름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젊은 남자의 눈동자가 조금은 무디어져 있었다. 입꼬리에 미소의 흔적까지 매달고 있으니 그것을 경계가 풀린 것으로 착각할 만도 했다. 게다가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자리를 옮기던 처음과 달리 제법 긴 시간, 한자리에 머물면서 그룹 고위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자신들에게도 젊은 남자 앞의 두 사장과 같은 기회가 있겠다 기대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한 사람, 두 사람…… 서서히 남자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이 부사장, 내일 말이지…….”'부사장의 눈동자를 스치고 간 한 줄기 섬광이 주 사장의 말을 흐리게 만들었다. 남자의, 약간은 비뚜름해 있던 고개는 먹이를 발견한 포식자처럼 뻣뻣하게 곧추섰다.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던 미소가 걷히고 그 자리에는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다.'젊은 부사장을 바라보고 있던 두 명의 사장이 얼떨결에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부사장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팽팽한 긴장감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전이되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긴장한 기색을 보여 주지 않는 남자의 행동은 놀라움과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의구심은 곧 부사장의 시선 끝자락을 확인하고서 풀리게 되었다.'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우뚝 솟아 있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니 회장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장이 서 있는 곳이 곧, 중심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드러내 놓았든 그렇지 않든 사람들의 시선은 오히려 구석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모여 있었다. 정확히는 눈앞의 젊은 남자에게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며칠 전, SG그룹의 정기 인사가 있었다. 개혁과 쇄신이라는 그룹의 의지를 천명하듯 새로운 얼굴들이 각 계열사의 수장으로 등장했다. 30년 이상 SG그룹을 이끌어 왔던 인물들은 그룹의 미래를 위한다는 대의로 자의 반, 타의 반, 정상에서 물러났다. '새롭게 등장한 젊고 능력 있는 사장단을 보며 주요 일간지와 경제신문은 파격적인 인사라고 평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번에 발표된 사장단 명단에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는 남자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었다.'누구도 차기 후계자라는 것에 의심을 품지 않는 회장의 아들은 이제 겨우 서른다섯의 나이였다. 나이로만 보았다면 그가 명단에 올랐을 때, 재벌의 족벌세습에 대한 질타의 소리가 나와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번 인사에 누락된 것을 두고 세간에서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준 능력 때문이었다.'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다른 경영자들이 현상유지 또는 마이너스 성장에 허덕이고 있을 때 전년대비 가파르게 상승한 실적을 수치로 보여주면서 주주들과 호사가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였다. '처음 한두 번 손댄 사업에서 성공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성공을 두고 그룹의 후광 때문일 거라고 했다. 그러나 계속된 승승장구는 운과 배경이라는 소리를 쏙 들어가게 하였다.'이태진. SG건설의 부사장. 차 차기 최고경영자 1순위.'그의 존재로 인하여 그룹의 가치는 한 단계 상승했다. '이태진이 세대교체의 주역이 될 거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가 차기 후계구도의 마지막 단계인 이번 인사에서 누락됐을 때, 사람들이 한 번쯤 고개를 갸우뚱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정기인사 공고에는 올라 있지 않지만 기존의 전자부분에서 경험이 전무(全無)인 건설사 부사장으로 이동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현(現) 회장의 후계자 교육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이미 검증된 후계자에 대한 장고(長考)이지만, 혈육이라고 해도 공과 사가 분명하고 철저한 SG 회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였다.'“회장님이 자리를 옮기시려는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