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을 이기지 못해 눈을 뜬 지인은 익숙한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언제 집에 온 걸까? 그가 데려다 준거겠지?’'항상 일정 온도가 유지되는 집안은 늦더위에도 불구하고 상쾌할 정도로 시원했지만 지인의 마음은 춥기만 했다. 몸을 가로 세워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요한 집안과는 대조적으로 나무가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태풍이 온다고 했었지.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내리는 것처럼 먹먹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거센 바람과 퍼부어대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아 머리가 아파왔다. 사랑은 독이 되어 가느다란 바늘을 만들고 심장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봇물 터지듯 흘러내린 눈물이 귓가에 고였다. 어제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었는데 오늘은 이보다 더 불행할 수가 없었다. 낮은 흐느낌이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 아빠, 보고 싶어요. 흡.”'마음이 나약해지자 생각나는 것은 돌아가신 아빠였다. 그렇게 슬퍼했음에도 아직 충분치 않다 여겼었다. 모든 것을 쏟아 토해냈어도 그립기만 했다. 나락으로 치 닿아 버린 내 슬픈 사랑에 눈물이 쏟아졌다. '“흐윽, 흑. 하아.”'눈물이 흘러내릴 때마다 사랑도 조금씩 씻겨 내려가면 어떨까. 그것이 나에게 더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멍청한 생각에 고개를 좌우로 거칠게 흔들었다. '‘더 노력할 거야. 그와 어울리는 여자로 그에게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할 거야.’'가슴을 부여잡고 펑펑 운 결론은 하나였다. 이렇게 가슴이 아파도 그를 포기 할 수 없다는 것. 지인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에 비친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모습이 싫어 지인은 서둘러 샤워를 했다. 다시 잠들기는 틀린 것 같다는 결론에 따끈하게 우유를 데웠다. 그리고 주방 의자에 앉아 테라스를 바라봤다. 회오리치는 강한 바람에 수영장이 더러워지고 있었다. 빛을 잃어가는 그 모습이 자신처럼 느껴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마네킹처럼 굳어 아침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가씨! 여기 계셨습니까?”'별관으로 출근한 지수의 목소리에 지인의 눈동자가 초점을 찾았다. '“술을 마셨더니 잠이 오지 않아서요.”'“잠을 충분히 자야 하루를 가뿐하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은 본관에서 들자고 하십니다.”'“옷 갈아입고 나올게요.”'단정한 원피스로 갈아입은 지인이 푸석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시작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투명한 레드를 머금은 립글로스를 바르니 어지러운 마음과는 달리 얼굴은 화사하기만 했다. 지인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얼굴 근육을 풀었다. 이 정도면 될까. 잔뜩 미소를 머금고 나와 지수와 함께 본관으로 향했다. '“우리 지인이는 아침에도 빛이 나는구나.”'“안녕히 주무셨어요?”'“그래그래. 태풍이 왔다는데 자다 깨지는 않고?”'“자느라 몰랐어요. 빗소리도 들리지 않던데요.”'작은 거짓말을 내뱉으며 가라앉은 마음을 웃음으로 포장했다. 방긋거리는 지인을 보며 태성도 덩달아 웃기 시작했다. '“당신은 아침부터 뭐가 그리 즐거워요? 난 편두통 때문에 짜증이 나는데.”'“아프면 약을 먹지 꼭 저러는구나.”'“어머니 괜찮으세요?”'혜란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걱정이 가득한 지인에게 미소를 보냈다.'“심하지는 않아. 어제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잠을 설쳐서 말이야. 방음 공사를 했는데도 왜 그러지?”'“당신이 바늘같이 예민한 신경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지. 난 하나도 들리지 않던걸?”'“지금 둔하다고 자랑하는 건가요? 우리 아들들은 아직도 안내려온 거야?”'“곧 내려오실 겁니다.”'아침식사를 총괄하던 한 실장이 혜란에게 대답했다.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식사는 오랜만이기에 꼼꼼히 상을 살피고 있었다. 마침내 이헌과 시헌도 내려와 온가족이 직방형의 우윳빛 대리석 식탁에 앉았다. 마주 앉은 이헌이 눈인사를 건네 왔다. 잘 잤냐고 다정하게 묻는 그의 미소에 환하게 웃어보았지만 싸늘한 바람이 가슴 한쪽을 스쳐지나갔다. '“오랜만에 같이 아침을 하는구나. 이헌이 네 결혼은 언제가 좋겠니?”'“9월에 하죠.”'“아들, 지금이 9월이라고 말하고 싶구나. 결혼에 준비할 게 얼마나 많은데 저런 소리를 하는지 원.”'다시 시작되는 두통에 혜란이 혀를 끌끌 차며 이헌을 나무랐다. '“준비는 무슨 준비입니까. 중요한 지인들만 불러서 정원에서 하죠.”'“야외 결혼식은 좋은 생각이다만 지인이 원하는 결혼식이 뭔지 물어는 봤니?”'“저는 괜찮아요. 간단하게 하는 편이 더 마음도 편하고요. 아빠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결혼해도 되나 싶기도 한걸요.”'“진태도 네가 우리 가족이 되는 것을 좋아할 게다. 성대하고 화려한 것보다는 경건하게 하는 쪽으로 결정을 하자꾸나.”'혜란이 꺼낸 결혼식 얘기 때문에 아침은 소란스럽게 시작됐다. 결론은 9월 안에 하자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은 혜란이 준비하기로 결정됐다. 순식간에 진행 된 얘기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의 합법적인 여자가 된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침을 먹고 출근하는 이헌을 배웅하기 위해 두 사람은 지하로 내려왔다. 이헌은 익숙하게 지인의 손을 자신의 손에 끼워 넣고 수많은 차들 사이에서 능숙하게 자신의 차를 찾았다. 그리고 지인을 조수석에 태웠다.'“별관 앞에서 내려줄게. 당신과 상의도 없이 결혼이 진행돼서 미안해.”'“당연한 수순이었는걸요. 전 좋아요.”'정말 그랬다.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지인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그와 부부가 된다면 불안한 마음이 멈출 것만 같았다. 그의 옆자리는 내 것이라고 모두에게 공표하고 인정받는 날이 드디어 오게 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노력한다면 착한 이헌은 언젠가 자신을 사랑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인은 막연하게 결혼식을 떠올리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사랑은 아니더라도 그는 자신을 충분히 존중해 줄 것이다. 지금은 그것이면 되었다.'“오늘부터 공부하는 거야?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당신 몸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낮게 가라앉은 그의 시선에서 진득한 열기를 느꼈다. 이래서 착각했던 거다. 그의 눈동자가 날 삼킬 듯이 담고 있어서 사랑이라고 믿어버렸던 것이다. 지인은 낮은 떨림을 토해내는 심장을 외면하고 마주 시선을 보냈다.'“난 괜찮아요. 새로운 것을 배우게 돼서 기쁠 따름이에요.”'“훗, 공부를 좋아하다니 당신도 별나.”'“열심히 할 테니까 이헌 씨도 출근 잘해요.”'가까워지는 별관모습에 지인이 인사를 건넸다. 차가 멈추어 서고 지인이 내리려고 손잡이를 잡는데 달칵 소리가 났다. 흠칫 놀란 지인이 옆을 바라보자 이헌이 지척에 와있었다. 순간 놀란 마음에 숨을 들이 킨 지인의 입술을 이헌이 파고들었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이헌의 혀가 지인의 입안을 뜨겁게 훑어 내렸다. 척추를 타고 내달리는 짜릿함에 지인은 발끝에 힘을 주었다. 혀와 혀가 만나는 끈적임, 그 사이에 흐르는 달콤한 타액이 마찰되는 소리, 언제 멈추었는지도 모를 만큼 이헌과의 키스에 빠져들었다. '“하아, 하아.”'자신의 양복 옷깃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내쉬는 지인을 이헌이 뜨겁게 쳐다봤다. 아찔한 열망이 담긴 그 눈동자의 의미를 지인도 모르지 않았다. 덜컹 소리를 내며 심장이 팔딱거렸다. '“곧 당신을 갖게 될 거야.”'평소보다 더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느낄 틈도 없이 그가 내뱉은 말의 의미에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지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닦은 이헌이 순식간에 지인의 목선을 빨아들였다. 화들짝 놀라는 마음과는 다르게 육체는 이헌을 반기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닿기 편하도록 목을 돌리며 하얀 손가락으로 이헌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뱀파이어처럼 목을 탐하는 이헌이 좋았다. 숨기지 않고 욕구를 드러내는 그를 사랑했다. 피를 빨리고 정점의 쾌락을 맛보며 죽어간 뱀파이어의 여자처럼 지인의 눈도 야릿한 열기를 품었다. 욕심껏 지인의 여린 목덜미를 파고든 이헌이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열기로 젖은 지인의 눈을 마주하자 아랫배가 단단하게 뭉치기 시작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어서 내리는 게 좋겠어.”'지인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한껏 힘을 주며 차 밖으로 발을 내렸다. 이헌이 그런 지인을 주시하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지인은 여전히 달뜬 눈으로 사라지는 차를 응시했다. 쾌락에 끈적거리는 육체와는 다르게 심장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날 사랑하진 않아도 내 몸은 맘껏 사랑해 줄 것 같네.”'자신이 내뱉은 말에 가슴이 아려온다. 먼저 사랑한 것이 죄라면 어쩔 수 없다. 육체만을 원한다고 해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처참한 상황에 몸서리치면서도 날 원하는 그가 기쁘다. 지인은 보이지도 않는 차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잔뜩 부어오른 입술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