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5평 남짓한 사무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유달리 크게 들리는 그 곳은 마치 거대한 환기구 같다. 창에 두꺼운 블라인드가 쳐져있어서 시간은 짐작할 수 없고 공간 가운데 사무적으로 놓인 테이블에는 차 한 잔도 놓여있지 않다. 미끈하고 차가워 보이는 그 테이블은 그저 한쪽과 한쪽의 경계를 만들어주는 역할만 하고 있다. ' 테이블 양쪽에 앉아 있는 사람 사이로 흐르는 공기는 새벽안개처럼 탁하다. 탁한 안개를 헤치고 들어가면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젊은 여자와 뚱뚱하고 피부에 두드러기가 난, 단추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교복을 입은 남자 고등학생이 보인다. 너무도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자세히 보니 고등학생은 여자를 절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고, 여자는 탐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칼에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남학생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그 감정교환이 왠지 적절해 보이는 건 왜 일까? '“그러니까 미성년자는 곤란해요.”' 드디어 여자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발음은 분명했다. '“저는 소년가장이에요. 시켜주세요.”' 고등학생은 탁한 외모만큼이나 목소리도 탁했다. 울상을 짓는 바람에 두드러기는 더 부각되었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건 안 읽어 봤어요? 키는 180cm 이상. 눈은 다크블루에 가까운 검정. 쌍꺼풀은 절대 있으면 안 되고. 콧방울과 턱과의 거리 20cm 넘지 않을 정도의 작은 얼굴.”' 말하다말고 여자는 한숨을 쉰다. '“이 뒤로도 조건이 태산처럼 쌓여있지만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당신은 낙방이에요. 조건 중 무엇 하나 충족되는 게 없잖아요. 나가주세요.” ' 여자는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뚱뚱한 고등학생은 울상이 되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피로가 절절이 쌓인 얼굴이 된 여자는 철해놓은 서류를 넘긴다. 하다못해 교복을 벗고 올 정도의 주변머리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 두 번째 남자는 대머리의 40대 아저씨였다.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배를 내밀고 걸어오는 모습이 아저씨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 세 번째 남자는 운동복 차림의 30대 남자였다. 끝없이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과 일본 애니메이션 얘기만 해댔다. ' 네 번째 남자는 30대 후반의 고시생이었다. 공무원시험에 7년째 낙방했는데 나이제한에 걸려 이제 할 일이 없다고 했다. 얘기하는 내내 세상을 저주하고 울먹거리기 까지 했다. 여자는 턱을 괴고 멍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 이제 세상 구원까지 해달란 얘긴가. ' 다섯 번째 남자는 20대 후반의 젊은 남자였다. 푸른빛이 도는 검은 색 정장을 입은 그 남자는 문 끝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키가 컸다. 정장에 잘 감싸인 넒은 가슴부터 눈에 들어온다. ' 분명 얼굴은 말도 안 되는 녀석일거라 생각했다. 키가 큰 녀석들은 섬세하게 만들어진 구석이 없다. 뭐랄까. 사료만 잔뜩 먹여 살만 찌운 닭 같다고나 할까. ' 여자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고개를 숙인 남자의 머릿결은 매끄러웠다. 기분이 어쩐지 간지러워지기 시작한 여자는 턱선 밑을 손톱을 세워 긁었다. ' 들어선 남자가 얼굴을 든다. 갸름한 얼굴에 옆으로 긴 눈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우뚝 선 콧날은 피라미드처럼 비례가 잘 맞고 꽉 다문 입매도 여자처럼 아름다웠다. 캐러멜 색의 눈동자와 샴페인색의 머리칼. 피부는 사포로 문질러 놓은 것처럼 매끈하다. ' 공고에 쓴 조건과 거의 흡사했다. 아니 더 우수했다. 세상의 폭탄이란 폭탄은 모두 보게 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멀쩡한 남자라니. 여자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남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