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뭐라고? 약혼?” '“응. 약혼. 지난달에 장 회장님이 네 아빠한테 말씀하셨나 보더라. 창립 파티 하고 며칠 뒤에 말이야. 너도 알지? 장 회장님 둘째 아들.” '둘째…… 아들? '싱글벙글 좋아라하고 웃고 있는 박 여사와는 반대로 정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장 회장님의 둘째 아들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절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타고난 조건이 훌륭해서이기도 하지만 성격 파탄자로도 유명한 덕분이었다. 오죽하면 한때 심심치 않게 9시 뉴스에 얼굴을 내보일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물론 방송국에서는 장 회장을 염두에 두고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고 세심한 모자이크 처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게 어디 감춘다고 사람들이 모르고 넘어가겠는가. '미친 개……. 마치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졌다지, 아마? 정미는 이제 수험생이 된 남동생 동욱이 말해준 그의 닉네임을 기억해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시끄럽고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가만히 잘 있다가도 한 번 뚜껑이 열리면 개도 안 물어갈 놈으로 변모하는 통에 그런 닉네임이 붙었다는 설명 역시 뒤늦게 떠오르자 정미는 이를 아물었다. '그런데 그런 놈과 약혼을 하라? 안 될 말이었다. 아무리 옆구리가 시려 죽는다고 해도 그런 놈은 사절이었다. 세상 그 어느 누가 맞아 죽으려고 결혼을 한단 말인가. 그놈은 절대로 여자라고 봐줄 놈이 아니었다. 전적도 있지 않은가. 장본인이 아닌지라 사건의 전말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놈에게 맞아서 뇌진탕 진단까지 받았다고 들었다. 듣기로는 꽤 괜찮은 여자였다고 하는데, 그런 여자한테까지 손을 대는 놈이 그녀라고 봐주겠는가.'“어쩜 그렇게 훤칠한지 모르겠더라. 배우 했으면 딱인데! 소문이 좋지 않게 나서 사실 별로였는데 지난달에 직접 만나보고 나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뵈더라. 그리고 조 여사님도 널 괜찮게 보셨는지 되도록 빨리 자리 만들자고 하셨어. 아마도 다음 주 주말 정도 될 것 같으니까 혹시라도 잊어버리고 약속 같은 거 만들지 마, 알겠지?” '마치 내일 소풍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설레어 하는 박 여사의 모습에 정미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벌써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엄마, 소문은 괜히 나는 게 아니라고 했거든?”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제대한 후로는 조용하다고 하더라. 군대 갔다 와서는 변했대.” '그래서, 그런 놈과 약혼하라고? '“그래도 싫어. 절대로 싫어. 엄마는 귀도 없어? 엄마도 소문 들어서 알잖아. 걸핏하면 싸움질해서 경찰서를 밥 먹듯이 드나들었던 놈이야. 그뿐인 줄 알아? 폭주족 놀이도 했다는데, 나더러 그런 놈하고 약혼을 하라고? 절대로 싫어! 그리고 난 나보다 어린놈은 싫어. 그건 엄마도 알지?” '“그래봤자 겨우 두 살 차이밖에 더 돼?” '겨우 두 살이라도 싫은 건 싫은 거거든? '“정미야, 내가 이모저모 따져 보니까 결코 나쁜 자리가 아니더라. 오히려 좋은 혼처더라니까? 그리고 얼마나 잘났니? 그 인물이 보통 인물이니? 게다가 시집살이 시킬 사람도 없고 말이야. 장 회장님이나 조 여사님이나 널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던데, 설마 너한테 시집살이를 시키시겠어? 안 그래?” '하! 점점! '정미는 박 여사가 본격적으로 그녀를 설득하자 눈에 불을 켰다. '“그래? 그럼 엄마가 시집가면 되겠네. 엄마가 시집가. 난 안 가, 절대로!” '“정미야, 너무 싫다고만 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응? 엄마도 처음에는 별로였어. 하지만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잖아. 그러니까…….” '“됐거든?” '“시집 안 가면 너 아빠한테 쫓겨나. 알아?” '더 이상 듣고 있을 필요가 없겠다 싶어 잔뜩 콧방귀를 뀌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막 발을 올려놓던 정미는 박 여사의 말에 흠칫했다. 뭐? 뭐라고?'“쫓겨나다니? 내가 왜 쫓겨나?” '“네 아빠 콤플렉스, 너도 잘 알잖아.” '콤플렉스? 그, 그럼? '평상시에는 화통하고 남자답게 시원시원한 성격을 자랑하지만 한 번 뭔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불굴의 의지로 그 일을 꼭 해내고야 마는 윤철호 사장의 성격을 아는지라 박 여사의 말에 정미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일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서든 윤 사장을 이겨 먹을 수도 있겠으나 이번에는 안 될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딸을 희생시켜서라도 이번 일을 성사시키려 할 것이 확실했다. '만약 끝까지 싫다고 버티면 윤 사장의 성격상, 그녀를 꽁꽁 묶어 어디로든 도망가지 못하게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름 아닌 윤 사장의 평생소원을 이룰 수 있는 혼사가 아니던가. '순간 정미는 이미 한참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이 나자 이를 아드득 깨물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랬더라면 꼼짝없이 미친개하고 결혼할 상황에 처하진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때는 바야흐로 정확히 19년 전! 그녀가 열 살 때, 돌아가시기 직전인 할아버지께서 아무도 모르게 악착같이 한 푼, 두 푼 사 모았던 땅문서를 내놓으셨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지지리 궁상으로 살았던 윤철호 사장은 느닷없는 땅문서를 보고는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조부를 향해 불같은 화를 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많은 재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살림을 이어왔으니 어떻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조부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신도시 개발로 인해 윤 사장은 일명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때 얼마나 많은 이익을 봤는지는 오로지 윤 사장 혼자만이 알고 있는데, 어쨌든! 갑자기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탓에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신바람이 나 있던 윤 사장은 단 한 가지 아쉬움만은 떨칠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졸부라는 호칭이었다. '졸부가 나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힘들었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향해 졸부라고 뒤에서 손가락질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가난 때문에 겪었던 수모들을 한 방에 떨쳐 버리기 위해 고민한 끝에 재산의 상당량을 무모하게 태산 그룹에 왕창 투자를 했다. 소위 상류층의 콧대 높은 사람들 틈에서 대접 받으며 살 줄 알았던 윤 사장은 이내 실망을 하고 말았다. 그들은 대접은커녕 오히려 그를 무시하며 지금까지 졸부라며 은근히 따돌리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졸부 콤플렉스가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네 아빠 성격 잘 알지? 한 번 마음먹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물러나지 않는 거. 그러니까 싫으면 네가 직접 얘기해. 난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