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내 아들이구나. 그 어렵다는 고우대 수석 입학이라니. 하하하. 내가 네 덕에 어깨 한번 펴겠어. 어떻게 나한테서 이런 자식이 나온 건지 신기하구나.”'천식의 웃음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귀순의 얼굴은 형편없이 구겨져 갔고 그런 귀순을 보는 미애의 얼굴에는 비릿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미애는 이내 그런 표정을 싹 지운 채 언제나처럼 귀순의 눈치를 살피는 듯 고개를 숙였다.'“역시 엄마가 똑똑해야 돼. 사람은 무조건 똑똑하고 봐야 돼.”'천식의 그 말에 귀순은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미애를 들어앉히고도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던 인간이 그녀의 남편이라는 작자였다. 거기다 남편 역시 고작 중졸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 시골에서는 자신처럼 초등학교만 겨우 나온 여자는 아주 흔했다. 오빠들과 남동생의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누이들은 모두 공장으로 일하러 나가던 시대였다. 그러니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미애가 들어온 뒤론 사정이 달라졌다. 말끝마다 엄마가 똑똑해야 한다고, 그래서 정우가 똑똑한 거라고 했다.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남편이라는 작자는 양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다. 마치 자신은 이 집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시했고 잔인한 말로 그녀를 상처 입혔다.'그녀와 남편, 그리고 남편의 여자. 이렇게 틀어진 채 사는 게 벌써 이십 년이다. 귀순은 여전히 자다가다 불쑥불쑥 치솟는 화를 참기 위해 한겨울에도 얼음물을 들이키며 살고 있었다. '“정우야, 고맙다. 내가 가방끈이 짧은 게 평생의 한이었는데 네 덕에 이제 이 애비가 어디 가서도 큰소리 칠 수 있겠어. 허허허.”'“대학 들어간 게 무어 그리 대수라고. 흥.”'결국 화를 참다못한 귀순이 한마디 하자 이내 천식의 불호령이 이어졌다.'“지금 뭐라는 거야? 그냥 지방 대학, 그것도 겨우겨우 들어간 거랑 서울 고우대 의대 수석 입학하고 같아? 이 사람이 어디 비교할 데가 없어서.”'천식은 혹시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정우의 마음이 다칠까 싶어 정우의 기색을 살피느라 귀순이 느낄 서운함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정우야, 서운해 할 거 없다. 이 사람이 뭘 잘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그래, 정우 살 집은 정했고?”'귀순에게는 찬바람이 쌩 불 정도로 냉랭한 천식이다. 그러나 미애를 대할 때면 그 냉랭하던 천식은 없다. 미애를 마주할 때면 보들보들 봄바람이라고 할 만큼 부드러운 남자가 천식이었다.'“무슨 집까지. 아직 어린데 그냥 하숙이나 시키려고요.”'그러나 그 말 한 마디를 꺼내면서도 미애는 마치 귀순의 눈치를 보는 듯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 모습에 천식은 또 한 번 괜스레 미애에게 미안해졌다. 누가 봐도 넘치는 사람이 자신 옆에 있어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괜히 분란 일으킬까봐 언제나 조심 또 조심하는 모습이 그저 고마웠다. '미애가 귀순의 눈치를 볼 때면 천식은 귀순이 더더욱 미워졌다. 결혼해서 남들 다 낳는 아들 하나 낳지 못한 주제에 자신이 내쳐도 할 말이 없어야 할 사람이 바로 귀순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데리고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주제에 감히 밀양 박 씨 대를 이어 줄 아들 정우를 낳아 준 미애에게 틈나는 대로 구박을 할 때면 미애가 뭐라고 하던 그냥 귀순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착한 미애는 그런 천식을 말렸다. 조강지처 버리면 벌 받는다고, 자신은 그냥 이렇게 옆에서 가끔 얼굴 보며 사는 걸로 만족한다 했다. 그러니 자신이 그런 미애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마음마저도 비단결인 미애였다. 어떻게 이렇게 고운 사람이 자신의 사람이 된 건지 천식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전생에 자신이 많은 덕을 쌓아 이렇게 복을 받은 거라 그리 믿으며 살고 있었다.'“아니, 이 사람이.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나. 우리 정우가 어떤 아들인가. 밀양 박 씨 대를 이어 줄 아들이네. 하숙은 불편해서 안 돼. 그냥 아파트 하나 사줘.”'“여보, 무슨 아파트씩이나.”'귀순은 천식의 입에서 아파트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말리려 들었지만 천식이 그런 귀순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그럼 대를 이을 자식 서울로 유학 가는데 고작 하숙이나 시키라는 거야? 안 그래도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거 좋아하는 애가 북적북적 하숙집에서 어떻게 지내? 이 사람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적당한 아파트 하나 알아봐 줄 생각은 않고. 사람이 마음보를 좀 곱게 써. 정우가 누구야. 내 제사 차려 줄 아들이야. 내가 아들이 둘이야, 셋이야? 고작 정우 하난데 정우 녀석 아파트 하나 못해 줄 형편도 아니고. 돈 쌓아두고 있다 죽을 때 갖고 갈 것도 아닌데 정우에게 뭘 아껴?”'언제나처럼 천식은 도리어 큰소리를 땅땅 치고 나왔다. 귀순은 너무도 화가 나고 분했지만 대를 이을 자식이라는 말이 나오면 언제나처럼 할 말이 없었다. '딸만 내리 넷이었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남편은 오입질마저도 당당하게 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언제나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렇게 많은 여자를 만나고서도 그의 자식은 자신이 낳은 딸 넷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도 미애를 들어앉힌 뒤로는 끝이었다. 아들을 낳은 여자는 그녀보다 한참 어렸고 또 예뻤다. 누가 봐도 귀순이 질 싸움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혼해 달라는 남편의 폭언을 참았고 그의 폭력도 견뎠다. 어떻게든 이혼만은 막으려하던 귀순의 바람 때문인지 남편의 여자는 첩의 자리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허울뿐인 처라는 자리를 자신이 낳은 네 딸을 위해 견뎌냈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지나며 쌓이는 화로 귀순은 병이 생겼다. 가만있어도 몸에 열이 났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저 길을 가다가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큰 병이 생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병원을 갔더니 화병이라고 했다. 화병이라는 말에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 뭐 하러 이런 빈껍데기와 사나 싶어 이혼을 결심했다. 늦은 나이였지만 어떻게든 헤어져 하루라도 편히 살아야겠다 마음먹었던 귀순을 말린 건 놀랍게도 그녀의 네 딸들이었다.'간통으로 신고하고 남편을 망신시킨 뒤 재산이고 뭐고 다 잊고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딸들은 엄마의 아픔은 알아주지 않았다. 도리어 이제까지 고생한 게 다 헛고생된다면서 그녀에게 더 참으라 했다. 몇 년 동안이나 두 집살이를 눈감아 줘서 이제와 이혼해봤자 재산도 얼마 손에 쥐지 못한다 말했다. 그러니 제발 꾹 참으며 그 여우같은 첩년이 재산 못 빼돌리게 잘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 '믿었던 딸들마저도 썩어나가는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순간 귀순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내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낳은 딸들인 것이다. 자신의 가슴이 썩어가도 자식에게 뭐든 내어주는 게 어미의 마음이었다. 자신을 병풍 취급하는 남편에 이젠 자식들마저 자신을 통해 아버지의 재산을 얻으려 할 뿐, 정작 누구 하나 진실로 자신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걸 알기에 귀순은 그저 외롭고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