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경은 반쯤 비운 마티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쏟아지는 하품을 억지로 삼켰다. 피곤하고 지루했다. 술은 독하고, 음악은 시끄럽고, 실내 공기는 끈적거렸다.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애초 가볍게 한잔하면서 몸을 풀자는 인서의 강권을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왜, 재미없어?”'잠시 전 어디론가 사라졌던 인서가 희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콧날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돋아난 것이 한바탕 춤이라도 추고 온 모양이었다. 보경은 인서가 뿜어내는 메케한 담배 연기를 피해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졸려.”'“이제 겨우 열 시 조금 넘었어. 아직 초저녁이라고.”'“밤새도록 춤과 음악을 즐기는 너 같은 파티족에게나 초저녁이겠지. 아침 아홉 시면 어김없이 출근해야 하는 나 같은 직장인한테는 벌써 꿈나라에 들었어야 할 시간이거든.”'“잘났어, 정말! 아직 첫 출근도 안 했으면서.”'인서가 옆 스툴에 자리 잡고 앉으면서 공연히 보경의 어깨를 건드렸다. 제 딴에는 서운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지만, 어깨를 밀치는 동작에 오랜 친구를 향한 깊은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보경의 고단한 눈매가 어느덧 부드럽게 풀렸다.'“어쨌든 지금은 흥겨운 파티장보다 아늑한 침대가 더 그리워.”'“진짜 출근할 거야?”'“진짜지 그럼. 취직을 했으면 당연히 출근해야 하는 거 아니야?”'“느닷없이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다. 너희 아빠 성격에 취직하라면서 네 등 떠밀었을 리는 없고.”'“그냥 일이 하고 싶어졌어.”'“퍽도 그렇겠다. 솔직히 고백하시지?”'인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보경을 쳐다보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타는 속내를 훤히 안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보경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뭘 고백해?”'“너희 엄마 친구 분이 경영하는 갤러리에, 없는 자리 만들어서까지 굳이 나가려고 하는 속사정 말이야.”'“그런 거 없거든.” '“순순히 자백할래, 아니면 한 대 맞고 얘기할래?”'“말할 게 있어야 자백하든 얘기하든 하지. 속사정 같은 거 없걸랑요.”'“아무래도 보경이 너 좀 맞아야겠다.”'인서가 정색하며 눈초리를 흘겼다. 폭력까지야 휘두를 그녀가 아니지만 이대로 딱 잡아뗐다가는 며칠은 삐쳐서 얼굴도 안 볼 기세였다. 보경은 에둘러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십년지기에게조차 속 시원히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어느 순간 모든 게 무료해졌다고나 할까. 쇼핑과 파티로 점철된 내 생활이 한없이 무의미해 보여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어. 그동안 너무 소비 지향적인 삶을 산 것 같아.”'“결혼 안 하려는 발악이 아니고?”'인서가 정확하게 핵심을 짚었다. 언제나 그렇듯 돌려서 이야기하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보경은 마지못해 인정했다.'“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고.”'“너희 엄마 아직도 형민 오빠한테 미련이 남으셨다니?”'인서가 또 한 번 핵심을 찔렀다. 이쯤 되자 보경은 이제 감추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단짝 친구에게 아픈 속내를 죄다 풀어놓기로 했다.'“내가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하도 질색하니까 겉으로 내색은 안 해. 근데 눈치가 그런 거 같아.”'“너희 엄마도 참 어지간하시다. 그 얘기를 듣고도 아직 미련을 못 버리시고.”'“그날 발리에서 있었던 일, 우리 엄마 아빠는 정확히 모르셔. 내가 일부러 자세한 얘기는 안 했거든. 그냥 형민 오빠한테 나 말고 다른 여자가 있다고만 했어.”'“그러게 내가 뭐랬니? 그 인간 비리를 만천하에 죄다 까발려야 한다고 했잖아.”'“그래 봐야 내 얼굴에 침 뱉기지.”'“아휴, 나는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암튼 조심해. 나, 형민 오빠 봤어.”'순간적으로 보경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느닷없이 명치가 콱 막혀버린 느낌이었다. 있는 힘껏 산소를 폐부 안으로 들이마셨다. 술 냄새와 담배 연기에 찌든 퀴퀴한 공기가 힘겹게 허파꽈리를 채워나갔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얼굴 보지 않고 지내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형민과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여기서? 언제?”'“좀 전에 저쪽에서.”'“요즘 통 이런 자리에는 얼굴 내밀지 않았잖아.”'“그랬지. 동일제약 기획실장 자리 꿰차고 들어앉은 뒤로 한동안 얌전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짠 하니 나타나주셨더라고.”'“그쪽에서도 너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