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바빠?'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오자, 태준의 미간이 희미하게 떨렸다.'“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으음, 나 지금 병원 근처에 와 있거든. 점심 같이 할래?'웬일로 점심을 같이 하자는 지란의 말에 태준의 굳어져 있던 얼굴이 단박에 쫙 펴졌다.'“병원 근처? 알겠어. 바로 내려갈 테니까 정문에서 기다려 줄래?”'-알았어.'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전화를 끊는 지란의 여운을 조금 더 느끼며 폴더를 닫은 태준은 가운을 벗고는 책상을 정리했다.'“이 간호사?”'“네, 선생님.”'“나 두 시 오십 분까지 들어올 테니까 그리 알아요.”'“점심 드시러 가시는 건가요?”'“맞아요.”'“이야, 울 선생님 애인 분이랑 식사하시나 보다. 그렇죠?”'호기심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이 간호사를 쳐다본 태준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미소에 이 간호사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드리워졌다.'“좋으시겠다.”'“이 간호사는 애인 많잖아요.”'태준의 농담에 그녀가 정색을 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어머, 그런 말은 농담으로도 하지 마세요. 정말 싫어요.”'“하하하, 맞나 보다.”'“어머머, 선생님!”'어머머를 연발하며 서둘러 진료실을 나가는 이 간호사 때문에 태준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걸리고 말았다. 재킷을 입기에는 날씨가 더운 것 같아 지갑만 챙겨 주머니에 넣고 병원을 나서는 그를 김 간호사가 아깝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아깝다, 아까워.”'“아깝긴 뭐가 아까운데?”'친구인 서 간호사가 혀를 끌끌 차며 타박했지만, 김 간호사의 눈길은 멀어지는 태준의 등에 꽂혀 있을 뿐이었다.'“쯧쯧,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니까 그러네.”'“그러게. 후후후! 우리도 밥 먹으러 가자.”'“그래.”'시간별로 돌아가며 일을 하기에 점심시간이라 할지라도 모든 간호사들이 일제히 점심을 먹으러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총 네 개의 소아과 진료실이 있는 영대종합병원은 일반 간호사 외에도 교수 개인별로까지 간호사들이 붙어 보조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높은 불임치료 성공률 때문에 환자들이 영대를 찾았고, 그 여파로 소아과까지 환자수가 급증하고 바쁜 나날을 보고 있는 태준이었다.'근 세 달 만에 보는 지란이라서 그런지 태준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달래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항상 느긋함이 몸에 밴 그이지만 지란을 만날 때만큼은 그 느긋함이 저 멀리 달아나 버리는 것 같았다. 10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내내 숫자를 몇 번이나 올려다봤는지 모를 정도였다.'‘1층입니다.’ 라는 소리에 답답한 한숨을 내쉰 태준이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내리듯 밖으로 나와 정문 앞을 눈으로 훑었다.'“지란아!”'태준의 외침 소리에 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던 지란이 고개를 휙 돌려, 근 세 달 만에 보는 친구에게 환한 미소를 던지며 손을 흔들었다.'“태준아!”'지란의 외침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태준과 지란을 번갈아 쳐다봤다. 지란은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폴짝폴짝 뛰어 태준에게로 다가가 덥석 안겼다.'“와, 너무 보고 싶었어.”'“보고 싶었단 사람이 전화 한 통 안 해?”'“흐흐흐, 바빴어.”'“입술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해라.”'태준의 밉지 않은 타박에 지란이 배시시 웃으며 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툭툭 쳤다.'“에이, 그래서 삐졌어?”'“삐지긴.”'그런 말을 하는 그가 얼마나 섭섭해 하고 있는지 안 지란이 환하게 웃으며 그의 어개를 톡톡 두드리며 눈웃음을 쳤다.'“삐지면 안돼, 태준아!”'“정말……. 그런데 지금 오는 길이야?”'“응, 공항에 내려서 바로 온 거야. 그러니까 나 밥 사 줘.”'“하여튼. 뭐 먹고 싶은데?”'“얼큰한 김치찌개.”'“그것만?”'“아니.”'“그럼?”'“진짜로 맛있는 밥!”'“어이구, 따라와.”'“응.”'새끼 고양이처럼 활짝 웃으며 따라오는 지란 때문에 태준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걸렸다.''“그렇게 맛있어?”'쩝쩝거리며 게걸스럽게 먹어 대는 지란 때문에 태준은 숟가락을 든 채로 물었다.'“으응.”'“천천히 먹어.”'“아, 너무 맛있어. 정말 맛있어서 죽을 것 같아.”'“누가 보면 너 아주 못사는 나라 가서 고생 엄청 하고 온 줄 알겠다.”'“큭큭큭, 흉측해?”'“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