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날이 밝기 전인 이른 새벽, 여진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식구 중 가장 먼저 일어나 새벽을 맞이했다. 여진의 가슴 위를 묵직하게 누르고 있는 창수의 손은 평생 흙을 퍼서 반죽하고 빚느라 억세고 거칠었지만 여진은 세상에서 그의 손만큼 따뜻하고 포근한 손은 없다고 생각했다. '창수의 잠이 깰까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내려놓은 여진이 살금살금 이불을 걷고 나오려 하자 창수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저 때문에 깨셨어요?”'“흠.”'그녀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묻으며 깊게 숨을 들이쉰 창수는 꼼지락거리며 품을 빠져나가려는 여진을 더 꽉 붙잡고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어머님 깨시기 전에 나가 봐야 해요. 이러지 마요.”'“괜찮아. 조금만. 응?”'창수의 손이 곧 옷섶을 풀어 헤칠 기세였기에 안 되겠다 여긴 여진은 좀 억세다 싶을 정도로 그의 손을 밀어내고 얼른 이불을 빠져나왔다.'깊어 가는 초겨울 새벽 공기는 상당히 차가워서 후 하고 입을 열자 하얀 입김이 사방으로 푹 퍼졌다.'여진은 부엌으로 들어가 쌀과 보리를 적당히 섞은 함지박에 물을 붓고 박박 문질렀다. 그렇게 뽀얀 뜬물이 올라오길 몇 차례, 말간 물이 고이자 곧 가마솥에 밥을 짓기 시작했다.'가마솥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올 무렵, 삐거덕거리는 낡은 부엌문을 열고 시어머니가 안으로 들어섰다.'“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머님?”'“그래. 너도 잘 잤니?”'“네.”'고부간이라기보다는 딸과 어머니 같은 두 여자의 대화는 짧은 말 속에서도 정겨움이 묻어났다. '마을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창수의 집은 싸리문을 열고 나가면 바다가 바로 앞이라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 주는 것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여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바다가 아니었다면 창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그를 만난 것은 하늘의 인연이라 생각했다.'“그럼 오늘 저 도자기들을 모두 팔 수 있단 말이에요?”'“그렇다니까. 우리 집뿐만 아니라 이 마을에 있는 도자기는 모두 팔릴 거야.”'“잘됐네요, 정말.”'창수가 살고 있는 곳은 조선에서도 유명한 도자기 마을로, 내로라하는 고관들은 물론 임금께 올리는 진상품까지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유명세 때문에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꼭 거쳐 가는 곳이 이 마을이기도 했다. '벌써 5대째 도공으로 살고 있는 창수는 자신의 직업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왜놈에게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는 증조부하며 2년 전 쳐들어온 왜놈들의 칼에 무참히 살해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가슴 한구석에 아픈 상처와 깊은 그리움을 새겨 놓았다.'하지만 여진, 그녀를 만나고부터 창수는 아픈 상처와 그리움의 자리마다 그녀를 채워 넣었고, 이제는 더 이상 피투성이로 죽어 가던 아버지에 대한 무서운 꿈자리가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