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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생의 본분은 공부일 텐데 3권
지은이│슬로프
펴낸곳│로즈엔
투고메일│editor@ridi.com
ⓒ 슬로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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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2)
검술 대회 결승전이 완전히 막을 내린 후, 로즈는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로 돌아왔다.
제스퍼와는 인사를 나누고 축하를 전할 틈도 없었다. 우승한 직후, 제스퍼가 황제를 알현하러 간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대회가 끝났음에도 여기저기서 여전히 제스퍼 콘웨이라는 이름이 들려왔다. 내일 신문에서도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
연속 우승을 거머쥔 제스퍼는 자신의 실력을 한 번 더 입증해 냈다.
로즈는 새삼 제스퍼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실감했다. 공부가 귀찮다고 투덜거리는 모습만 주로 보다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순간을 거머쥐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유려하게 움직이며 헥스를 쓰러뜨리던 장면이 머릿속에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
‘괜히 검술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어.’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훈련을 했을까. 분명히 고된 시간을 지나쳐 왔을 것이다. 제스퍼에게 순수한 존경심까지 생겼다.
‘그 정도로 멋졌어….’
브라일리와 함께 복도를 걸어 기숙사 방 앞에 도달하는 짧은 동안에도, 로즈는 제스퍼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모두가 경탄을 담은 목소리로 떠들었다.
“마지막에 투구 벗은 거 봤어?”
“성격이 이상해서 그렇지, 정말 잘생겼기는 해.”
사실은 성격도 나쁘지 않은데. 로즈는 여자애들 옆을 스쳐 지나가며 속으로 생각했다. 삼삼오오 모여 복도에서 종알거리는 목소리가 로즈의 귓가에 콕콕 박혔다.
“그런데 경기 끝나고 제스퍼가 한참 동안 누굴 보는 것 같더라.”
“그래? 난 멀리 앉아서 그것까진 안 보였는데.”
“뭐, 내 착각일 수도 있어.”
“아델라 본 거 아니야?”
“어머, 그럴지도 모르겠다.”
로즈는 못 들은 척 신경 쓰지 않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기숙사 방 안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자꾸만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아른거렸다.
경기 직후 투구를 벗은 제스퍼의 모습. 올곧던 시선의 행방이 어디였을지 궁금해졌다.
‘…알아서 뭐 어쩌려고.’
로즈가 머리를 좌우로 빠르게 털어 냈다.
‘거기에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냥 우연히 내 근처를 본 거겠지.’
로즈는 의도적으로 제스퍼에 관한 생각을 덮어 두려 애쓰면서 씻고 취침 준비를 했다.
자기 전에 브라일리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허브차 한 잔을 마셨다. 로즈가 따뜻한 찻물을 홀짝이다가, 갑자기 또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혹시나 날 본 거면… 아니야, 확인할 방법도 없잖아. 맞으면 뭐 어쩌게….’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키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오후에 본 제스퍼가 자꾸만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고민해서 답이 안 나올 법한 문제는 내려놓는 게 합리적일 텐데.
콕. 그때 브라일리가 로즈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멍하니 있던 로즈가 움찔거리며 브라일리를 돌아보았다.
“왜, 왜?”
“로즈. 너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생각 하니?”
“나… 별로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차 다 식겠다.”
로즈가 정신을 차리고 찻잔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온기가 조금 사그라져 있었다. 도대체 몇 분 동안 넋을 놓았던 건지.
브라일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로즈를 훑어보다가 투덜댔다.
“나한테 말해 봐.”
“아니, 나 별생각 안 했어….”
“거짓말.”
로즈가 뜨끔했다. 눈치 빠른 브라일리를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다. 로즈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브리, 있잖아.”
“응. 응.”
“논리적인 해답을 찾지 못할 문제에 관해서 끊임없이 사색하는 이유가 뭘까?”
“뭐라고?”
“왜… 사람은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는 걸까? 생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거지? 어떤 생각을 생각하겠다고 생각하는 걸 어떻게 생각….”
“얘 도대체 뭐라는 거니.”
“미안. 나 지금 사실 머리가 어지러워.”
“그래 보여.”
로즈가 찻잔을 내려놓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 와중에도 아까 마주한 제스퍼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빗자루로 머릿속을 쓱쓱 문질러 닦아 내고만 싶었다.
***
검술 대회 다음 날 아침이었다.
로즈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자기 직전까지 생각한 게 제스퍼여서 그런지, 꿈에서도 제스퍼가 나왔다.
로즈는 침대에서 눈을 번쩍 뜨고서 오랫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꿈의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제스퍼가 주인공이었음은 명확했다.
로즈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면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자는 사이에 다홍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뻗쳐 있었다.
‘정신… 차려야지…. 머리를 비우자.’
손바닥으로 양 뺨을 가볍게 때리며 다짐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다짐이 무력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침에 우편이 도착했다길래 당연히 집에서 보낸 줄 알고 신나서 받아 보았더니, 발신인에 예상 밖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든 콘웨이였다.
봉투는 콘웨이가의 인장으로 봉해져 있었다.
‘제스퍼의 형이 나한테 왜…?’
당황해서 봉투를 열어 보니 정갈한 명필로 쓴 편지가 있었다. 편지 내용에는 앞뒤로 귀족들이 의례상 사용하는 미사여구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언뜻 보면 긴 편지 같았지만, 사실 담긴 내용은 간단했다. 물론 로즈가 받아들이기에는 절대로 간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오늘 오후에 마차를 보낼 테니, 혼자서 콘웨이가의 타운 하우스로 와 달라는 초대장이었다. 왜 부르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추신. 제스퍼에게는 말하지 않는 쪽이 좋을 겁니다.
형식상으로만 초대장이었을 뿐이지, 사실상 강요였다. 콘웨이 공작가의 후계자가 직접 마차까지 보내서 부르는데, 그걸 거절할 수 있는 평민은 없었다.
‘나를… 나를 도대체 왜….’
제스퍼 콘웨이를 머릿속에서 내보내려 했더니, 이제는 이든 콘웨이가 들어와 온통 헤집어 놓았다. 어제오늘 콘웨이 때문에 두통이 일 정도로 많은 생각이 솟아올랐다.
그때 뒤늦게 깨어난 브라일리의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로즈으, 뭐야? 편지 왔어?”
“아, 아무것도 아냐.”
로즈는 떨리는 목소리로 둘러대며 편지를 재빠르게 서랍 속에 구겨 넣었다.
이든 콘웨이가 자신을 왜 부르는 건지 여러 추측이 떠올랐지만, 무엇 하나 확신 가는 것이 없었다.
‘내가 제스퍼와 친해져서인가?’
동생의 인간관계 검증이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면… 내 과거에 대해서 아나?’
이쪽은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경우였다.
‘제스퍼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지. 그건 내가 제스퍼랑 친한 사이라는 걸 안다는 뜻일 텐데….’
여러 걱정과 고민에 빠진 로즈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갔다.
***
로즈는 온종일 정신이 빠져 있었다. 제스퍼에게 우승을 제대로 축하해 주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오전 강의가 제스퍼와 함께 듣는 광물학이라, 대화는 제법 나눈 것 같았으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넋이 나가 있었던 거다.
로즈는 이든이 편지에서 알려 준 대로, 정해진 시각에 아카데미 정문으로 나갔다. 그러자 평범한 마차 하나가 로즈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부가 로즈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든 콘웨이 경께서 보냈습니다.”
로즈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차에 올라탔다. 이든이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상황을 상정하고 그에 대한 답을 미리 생각해 두려 애썼다.
“하아….”
그러다 로즈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은 이든의 초대를 무시하고 달아나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현 상원 의원에 콘웨이 가문의 후계자를 그렇게 대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마차는 덜컹거리면서 한참을 나아갔다. 로즈는 긴장한 눈동자로 창문 밖을 살폈다. 마차의 목적지는 이든이 편지에서 이야기한 그대로였다.
수도에 있는 콘웨이 가문의 하우스. 그곳의 정문을 마차가 넘어가는 순간, 로즈는 속이 급격히 울렁거렸다. 저녁을 먹지도 않았는데 메스꺼움이 밀려들었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추어 섰고 마부가 문을 열어 주었다. 로즈는 손이 바르르 떨린다는 걸 숨기기 위해 꽉 주먹 쥐고서는 마차에서 내렸다.
중년 남성 한 명이 로즈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로즈 양, 절 따라오면 됩니다.”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
‘이곳의 집사인가?’
복장을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로즈는 막연하게 추측만 하며 남성을 따라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하고 비싼 것들로 가득한 공간이었으나, 그런 데에 신경이 갈 만한 여유가 없었다. 눈에 무엇 하나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로즈는 어쩌다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모른 채로 어느새 이든의 서재 앞에 다다랐다. 서재 문이 열리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까지도, 로즈는 이 모든 게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쿵. 로즈의 뒤에서 서재 문이 닫혔다. 로즈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든 콘웨이….’
로즈는 잔뜩 긴장한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스퍼와 무척이나 닮았으나, 제스퍼보다 조금 더 호리호리하고 예민한 인상의 남자였다.
키와 체격 모두 제스퍼 쪽이 더 컸다. 제스퍼가 평생 검을 쥐며 살아왔다면, 이든은 펜과 잉크의 힘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이든 콘웨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서며 말했다.
“로즈 벨, 맞나?”
날카롭고 냉랭한 목소리가 로즈의 귓가에 꽂혔다. 로즈는 마른침을 삼키며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고개를 숙여 귀족에게 예를 표한 후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로즈는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는 사람처럼 굴고자 애썼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겁에 질려 있었으나, 그런 두려움을 이든 앞에서 투명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정신 차려야 해.’
이든은 꼿꼿한 자세로 걸어오면서 소파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앉으라는 뜻 같았다.
로즈는 이든이 소파에 착석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의 맞은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렇게 둘이 마주 본 상태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든은 말없이 로즈를 훑어볼 뿐이었다. 눈매의 생김새 자체는 제스퍼보다 부드러웠으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을 하나하나 분해하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숨 막혀….’
제스퍼의 차가움 속에는 투박한 다정함이 담겨 있었지만, 이든은 겉도 속도 시린 사람 같았다. 훨씬 더 정교하게 벼려진 냉랭함이 이든에게서 느껴졌다.
이든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음에도, 전혀 웃는 얼굴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든의 속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든은 한참 동안 로즈를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불러서 놀랐을 텐데. 꽤 침착해 보이네.”
로즈는 속으로 안도했다. 잔뜩 겁먹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니 다행이었다.
“내가 로즈 양을 왜 불렀을 것 같나?”
“잘… 모르겠습니다.”
이든은 다리를 꼬고서 나긋나긋한 투로 말을 늘어놓았다.
“이름은 로즈 벨. 평민 장학생 전형으로 벤클리 아카데미에 들어왔고, 한 번 빼고는 수석을 놓친 적이 없다지. 고향은 퀄츠. 아래로 딸린 동생만 네 명. 맞나?”
로즈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날 조사했구나.’
갑작스레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이 있었기에.
퀄츠는 행정 체계가 느슨한 지역이었다. 따로 그 땅을 관리하는 영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는 주인이 있는 땅이었지만, 몰락한 이후 황실의 소유로 귀속되었다.
최근 몰락 귀족이 많아지면서 어영부영 황실 소유로 편입되어버린 지역이 제국 전역에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황실에서는 북쪽 외곽의 상업적 가치라고는 전혀 없는 땅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신분을 세탁해서 파고들기에는 퀄츠만 한 곳이 없었다. 작위를 샀던 쪽에서 행정관 한 명을 연결해 주었고, 금세 벨이라는 새로운 집안이 생겨났다. 행정 서류상으로는 로즈 벨은 퀄츠에서 태어난 퀄츠 토박이였다.
시골에서는 뒤늦게서야 인구 등록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나 영주가 없어 관리가 느슨한 지역은 더더욱 그랬다.
인구 조사관들도 세금을 뽑아낼 수 있는 땅만 샅샅이 훑을 뿐, 대부분의 주민들이 소박하게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퀄츠에는 관심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