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8. 악몽의 전주곡



새해로 넘어간 지 벌써 석 달째였다.
겨울 비수기에 접어들었던 미술관은 봄맞이 개장을 앞두고 단장에 한창이었다.
얼마 후면 청월 창립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다.
매년 이맘때 열리는 이 파티는 포레스트 청월이 생긴 이래 매해 열리는 자선 파티였다.
각계각층 인사들과 태원 계열사 임원들이 참석했고, 언론의 주목도 또한 높았다.
이에 청월의 직원들은 파티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인테리어부터 조명, 소품까지 디테일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나무 또한 작업실 정리에 열중했다.
단, 청월의 직원들과는 다른 의미였지만.

‘언제 그만둘지 모르니까….’

얼마 전 들은 소문에 의하면 이번 자선 파티 때 두 사람의 결혼 날짜가 발표될 거라 했다.
날짜는 아마도 오는 초여름쯤.
올해 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처럼 빠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맹렬했던 한파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나무는 여전히 그 한복판에 서 있는 듯 살갗이 아렸다.
평창 별장에서 돌아온 뒤 균열이 인 마음에서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입에 넘어가는 것부터 천천히 먹어.”

원준이 식혀 놓은 전복 톳죽은 딱 먹기 적당한 온도였다.
나무가 먹는 모습을 감상하듯 보던 원준은 뒤늦게 커피 한 잔을 내렸다.
그는 과일 몇 개만 입에 댈 뿐 다른 건 손도 대지 않았다.
식탁 위에 차려 놓은 건 결국 나무만을 위한 거였다.
그것도 원준이 직접 차린.
몇 술 뜨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을 때 그가 건넨 말은 또 어땠는가.

“왜, 입에 안 맞아?”
“…….”
“바로 얼려 온 거라 괜찮을 거라 했는데, 바로 먹는 거랑 아무래도 맛이 좀 다른가.”

어쩐지 입에 익은 맛이라 생각했는데.
제주도에서 그와 함께 먹었던 것과 똑같은 맛의 죽이었다.
그의 말을 토대로 보면 아마도 그곳에서 직접 만들어 왔을 죽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고작 나 하나 먹이겠다고 그렇게까지 할 사람은 아닌데.
원준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의아했다.
더 이상한 건 그 이후였다.
바로 다시 관계를 할 거란 예상을 깨고 원준은 그녀를 데리고 별장 밖으로 나갔다.
낡은 패딩 점퍼 대신 그가 준비한 두툼한 롱코트를 입고 그 위에 목도리까지 맸다.
전부 그녀를 위해 원준이 준비해 둔 것이었다.

“보여 줄 게 있어.”

그렇게 원준이 나무를 데려간 곳은 근처에 있는 수목원이었다.

[Forest in love]

거창하고 낯간지러운 명칭의 이 수목원은 통나무로 만든 아담한 작업장과 작지 않은 온실, 중간 크기의 인공 호수와 그 옆으로 이어진 플라타너스 길, 그리고 그 길 끝에는 펜션처럼 보이는 커다란 건물까지 갖춰져 있었다.
언젠가 저택을 나가면 아버지와 함께 만들고 싶었던 화원이 꼭 이러했다.
물론 이곳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은 규모지만,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은 그녀가 생각한 대로였다.
막연히 꿈꿔 왔던 곳이 실체화되어 눈앞에 펼쳐진 셈이었다.

“어때?”
“뭐가요?”
“여기, 네가 보기엔 어떠냐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영문을 몰라 눈만 크게 뜨던 나무를 보며 원준이 미소 지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그것을 다정히 쓸어 넘겨 주며 원준이 입술을 움직였다.

“주인이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

주인이라니.
망연해진 나무와는 달리 말도 안 되는 말을 건넨 당사자는 정작 태연했다.
때마침 원준에게 걸려 온 전화가 아니었다면 망부석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한참을 통화한 끝에 다시 온 원준은 꽤 곤란한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의 원준 역시 처음이라 나무는 퍽 당황스러웠다.

“가 봐야겠어. 회장님 호출이야. 일찍 입국한 거 들킨 모양이네.”
“…….”
“저녁까지 먹고 가려 했는데 아쉽게 되었군.”

원준은 정말 애석하다는 듯 쉽게 발을 돌리지 못했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원준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또 오자. 그때는 여기 어떻게 꾸밀지 생각해 두는 것도 좋겠지.”

다음에 여길 또 오자니…. 마지막까지 원준답지 않았다.
이렇듯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는 원준이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영원히 절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올라와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나무는 별장에서 느꼈던 감정에 매몰되어 허우적거렸다.

“바람이라도 쐬어야겠어.”

미열이 오른 건지 몸이 덥게 느껴졌다.
나무가 정리하던 접시들을 한쪽으로 치워 놓고 몸을 일으켰다.
한창 분주한 청월의 풍경을 뒤로한 채 나무가 식물원으로 가는 둘레길에 들어섰다.
연인의 길이라고 불리는 곳.
이곳에 오면 영락없이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었다.
그것을 지우며 애써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안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넘어왔다.
정 관장의 목소리였다.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정 관장의 목소리는 한껏 격양되어 있었다.

“우리 원준이가 무슨 여자한테 빠져. 우리 원준이가 어디 그럴 남자야? 그냥 잠시 노는 것뿐이지.”
“아니이, 나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조금 전 정 관장의 손님으로 온 명 장학 재단장 김명희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두 사람은 같은 부인회 소속이자 결혼 전부터 막역한 사이이기도 했다.

“근데 워낙 여자 멀리하던 구 부사장이니까 노파심에 얘기한 거지. 홍 여사도 걱정하는 눈치고.”
“결혼 전에 어디 안 놀아 본 남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우리 원준이는 다른 남자에 비하면….”
“알지, 알지. 아휴!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아니 나는 구 부사장이 안 하던 짓을 하면서까지 그 여자애를 끼고돈다고 해서….”
“김 단장 말 참 이상하게 하네. 안 하던 짓이라니?”
“나도 들은 게 있어서 그래. 걔가 그렇게 반반하다며? 남자 다 홀리고 다니게 생겼다고 방 여사가 그러던데.”
“걔? 놀기 좋게는 생겼지. 놀 만큼 놀라고 했어. 데리고 자고 싶으면 언제든지.”

두 사람의 대화에 나무는 그만 얼어붙었다.
자신과 원준의 관계를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니….

“하긴, 그런 애들은 딱 거기까지지.”
“원준이도 슬슬 질릴 때도 됐고, 결혼 전에 정리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고 방 여사한테도 전해.”
“그럼 됐네.”
“하여간 누가 딴따라 출신 아니랄까 봐 방 여사는 입이 싸도 너무 싸. 격 떨어지게.”

혜원이 찾아왔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 나무를 덮쳐 왔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굳어 버린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이 간신히 석상을 지지대 삼아 버티고 있었다.

‘어서 움직여!’

오직 그 일념으로 손가락을 말아 쥔 나무가 간신히 발을 뗐다.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그녀는 청월 밖으로 나왔다.
휴대폰도 가방도 작업실에 놓고, 외투마저 챙기지 못한 채로 나무는 앞만 보고 내달렸다.
넘쳐흐른 눈물이 뺨을 차게 식게 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하아, 하아.”

그녀는 길 한가운데서 웅크리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