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오매불망(寤寐不忘) : 자나깨나 잊지 못함.

1590년 한양 정월대보름, 눈 내린 숲을 울리는 힘찬 말발굽 소리가 휘영청 둥근 달을 가로질렀다. 말 위에 올라탄 늠름한 선균의 어깨엔 달빛이 반사되어 빛났다. 말의 박차를 힘껏 밀쳐내며 달리는 그는 시간이 촉박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흠…. 약조한 시간 안에 도착하려면 조금 더 서둘러야겠군! 으럇!”

선균은 사마시 진사와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에서 근무하다 얼마 전 통신사 서장관에 임명되어 곧 왜나라로 떠날 예정이었다.

***

“역시 성균관 대사성인 아버지 남익선의 맏아들이라 남다르군!”

“아닙니다. 대감!”

“어떤가? 이번에 나와 함께 왜나라에 가보지 않겠나?”

“영광입니다! 대감!”

그동안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던 그의 노력을 눈여겨보던 김성일 대감이 얼마 전, 그를 불러 조선통신사에 참여할 것을 명하였다.

그의 왜나라행이 결정되고 나서 어머니 정씨 부인은 제일 먼저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선균아! 왜나라에 가기 전에 별이한테 꼭 작별 인사를 하고 가야 한다! 그 아이가 너를 얼마나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

“별이가요? 왜요?”

“이런! 무심한 녀석! 별이가 너를 특별하게 은애하고 있잖니. 몰랐어?”

“에이. 어머니도 참, 은애라니요. 친동생 같은 별이가 어찌….”

선균의 얼굴에 번거로움이 스쳤다.

“아무튼 선균아, 하루를 멀다 하고 한씨 부인이 사람을 보내어 너의 얼굴 보기를 청하고 있으니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번 들려서 인사라도 하렴!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머니. 정월 대보름날 퇴청 후에 가겠다고 해주십시오.”

어머니의 당부에 퇴청하자마자 곧장 별이의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별이가 나를 은애한다고? 핫! 그 여드름투성이 꼬맹이가?’

솔직히 흘러간 어이가 없었다. 그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커서 자신에게 은애를 한다고 고백을 하다니. 쏜살처럼 빠른 시간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선균에게는 별의 마음이 와 닿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별은 그저 친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흠, 빨리 퇴청한 날은 집에 가서 쉬고 싶건만….”

올해 열네 살이 된 별이는 아버지 남익선의 죽마고우인 사헌부 장령 최한의 고명딸로 선균과는 어릴 적부터 막역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서 그런지 별은 그저 귀여운 여동생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별이는 눈이 빠지도록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에잇! 참, 오라버니가 왜 이리 늦으시는 걸까?”

“별이 아기씨! 광통교와 육조거리에서 고싸움놀이랑 씨름판이 열렸다는데 정말 안 가보실 거예요?”

단향이의 재촉에도 망부석처럼 선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별의 모습은 초조했다.

“가긴 어딜 가! 안 가! 선균 오라버니 기다려야 해!”

몸종 단향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날밤 부럼을 까서 우걱우걱 입에 집어넣었다.

“뭐, 아가씨가 오매불망 목 놓아 기다린다고 해도 도련님이 오시겠어요? 통신사 행렬 준비로 정월대보름에도 등청하셨다는데 그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오실 정신이 있으시겠어요?”

“단향이 너! 시끄러워!”

별이의 매서운 눈초리에 단향은 그제야 조용히 입을 다물고 단단한 날밤을 어금니로 깨물었다.

“아잇! 이놈의 부럼이 왜 이리 안 까진다니! 부스럼 안 나려면 먹어야 하는데. 아기씨도 좀 드실래요?”

“안 먹어! 안 먹는다고! 너나 먹어!”

괘팍한 표정으로 신경질 내는 별이의 얼굴에는 여드름이 가득 피어 있었다.

‘선균 도련님이 아가씨 얼굴 보고 안 도망 가면 다행이겠구만!’

혼잣말을 삼키는 단향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나왔다.

“에잇! 참, 얼굴은 왜 이렇게 붉은 거지?”

별이 역시 선균에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여드름이 다 들어갈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열네 살이 되자마자 그녀의 얼굴엔 울긋불긋 꽃이 피어났는데, 아무리 어성초로 세안을 하고 쌀가루로 붉은 기를 가라앉히려 해도 오히려 성난 얼굴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힝…. 이를 어쩐담?”

“아냐, 아냐! 고운 얼굴은 나중에 보여주면 되니까! 괜찮아! 하지만, 이런 얼굴로 어찌 오라버니를 만나지?”

기약 없는 바람들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별이는 끊임없이 별채와 안채를 서성였다.

‘아무리 엉망인 얼굴이라도 오라버니는 꼭 봐야 해! 보고 싶단 말이야. 힝….’

왜나라로 곧 그가 떠난다는 말에 별이는 하는 수 없이 잠시라도 그의 얼굴이라도 보여달라고 어머니에게 간청하였다. 초조하게 안채와 별채를 서성이는 별이를 보며 어머니 한씨 부인이 혀를 차며 말을 건넸다.

“별아! 그만 좀 얌전히 앉아 있으면 좋겠구나!”

“어머니! 정녕 선균 오라버니가 정말 정월대보름에 온다고 하셨다 했지요?”

“그래. 몇 번을 묻는 게냐.”

“근데 왜 이리 늦으시는 걸까요. 해가 지고 달이 떴는데 아직 기별이 없으시잖아요.”

선균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오매불망 기다리는 딸내미를 바라보는 한씨 부인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서렸다.

“바쁜 사람이니 퇴청도 늦겠지. 오면 내가 알려줄 터이니 단향이랑 저잣거리에 구경이라도 다녀오거라.”

“아니어요. 길이 엇갈리면 안 돼요! 어머니!”

별이는 어머니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추운 날씨 차가운 퇴청 마루에 앉아 대문을 바라보았다.

‘칫! 어머니는 아마도 누군가를 향한 연심은 겪어보지 않았던 거야. 어떻게 이런 나의 마음을 이해 못 하시는 걸까?’

하긴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한눈에 반하여 부부의 연을 맺으셨으니 어머니는 자신의 이런 짝사랑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실 것이다.

“힝….”

어머니에게 서운한 마음도 곧 잊은 채 별이는 코끝을 에는 추위에 부드러운 초피 갖옷을 단단히 여몄다.

‘역시 너구리 털보다 담비초피로 지은 갖옷이 좋긴 하구나. 부드럽고 따듯해.’

아버지에게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다 부리며 얻어낸 설빔이었다. 유난히 광택이 나고 색채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담비 초피로 짓은 갖옷은 따듯하고 보기 좋았다.

‘선균 오라버니에게 예쁘게 보여야 해! 조선에서 최고로 어여쁜 모습으로 말이야! 힛!’

선균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녀의 마음에 요란한 천둥번개를 몰고 다니는 태양과도 같은 사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들끼리 막역한 사이였기에 어렸을 때부터 별이는 선균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그가 마냥 좋았다. 그의 숨결만 느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별은 온종일 선균과 관련된 엉뚱한 생각으로 행복했다.

‘선균 오라버니가 친오라버니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오라버니를 마음껏 좋아해도 되잖아!’

그녀가 다섯 살 무렵, 그날도 선균과 별이는 뒷산 언덕에서 익숙하게 그네를 타고 새총으로 참새들을 쫓으며 놀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해라면 나는 달 할래! 왜냐하면 해와 달은 하늘의 주인이니까!”

아홉 살 선균을 향해 사랑 고백을 하는 다섯 살 별이를 보며 선균은 귀엽다는 듯 웃어주었다.

“그래? 나는 낮은 주관할 터이니 너는 밤을 주관하려무나!”

네 살 터울인 선균은 별이를 알뜰히도 챙기며 놀아주었다.

“잠깐! 그럼 해와 달은 못 만나는 건가? 해님은 낮에만 뜨고 달님은 밤에만 뜨니까?”

“당연하지!”

“아냐 아냐! 나는 구름 할래! 구름은 낮에도 있고 밤에도 있으니까! 난 선균 오라버니 옆에 꼭 붙어 있을 거야!”

“뭐라고? 하하!”

유난히 밝은 대보름 달을 쳐다보던 별이는 어린 시절 선균에게 그의 달이 되고 싶다고 외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영원히 오라버니 곁에 있을 거야!’

근데 그가 통신사 행렬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별이는 오랫동안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근심과 한숨으로 매일 밤을 지새웠다.

‘오라버니 없이 무슨 재미로 산단 말이지?’

추운 밤공기에도 아랑곳 않고 퇴청 마루에 앉아 선균 생각에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서 한숨을 쉬는 딸내미를 보며 한씨 부인도 덩달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쯧쯧…. 저 철없는 것을 어찌하면 좋을까.”

한씨 부인은 어린 딸의 적극적인 연심에 혹시라도 선균이 부담스러워 부리나케 도망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별이는 상관없다는 듯 일편단심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

잠시 후, 대문 밖으로 요란한 말소리와 함께 선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럇! 워워!”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관복을 입고 도착한 선균이 말에서 가뿐히 내려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오라버니!”

소매가 넓은 푸른 관복을 입은 그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별이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 자리에 멈춰서 선균을 바라보았다.

“꼬맹이! 잘 지냈느냐? 오라버니 왔다!”

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들어선 선균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별이에게 다가와 건성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거리고 곧장 한씨 부인에게로 향했다.

“선균이 왔습니다! 어머님!”

한씨 부인을 어머니라 부르며 마치 친아들처럼 살갑게 인사하는 선균을 보며 한씨 부인도 버선발로 마루에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선균이 자네 왔는가? 어서 오시게!”

“제가 너무 늦게 온 것은 아닌지요.”

“아냐! 아냐! 자네 좋아하는 돼지고기로 자저육(煮豬肉) 만들어 놓았네!”

단향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편육과 맛깔나는 나물들을 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어머님! 너무 맛있겠습니다! 대감께서는 아직 퇴청 전이신지요?”

“요즘 많이 늦으신다네. 우선 자네 먼저 들게나!”

“아닙니다! 대감 오시면 같이 들겠습니다!”

정갈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선균의 반듯한 모습에 한씨 부인도 마음을 빼앗겼다.

“어쩜 저리도 사람이 반듯할까? 호호! 자네가 이러니까 우리 별이가 안달이 난걸세.”

“네? 과찬이십니다. 어머님!”

한씨 부인과 선균이 다정스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불만스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별이에게 단향이가 다가왔다.

“아기씨, 안 바쁘시면 길 좀 비켜주시겠어요? 얼른 저녁상을 차려야 하는데 아기씨가 길을 막고 계십니다.”

“뭐라고? 단향이 너!”

“아니면 얼른 선균 도련님 옆으로 가시던지요. 왜 이렇게 우물쭈물하시는 거예요?”

“내가 언제 우물쭈물했다고 그래?”

그렇게 말은 해도 빤히 보이는 망설임에 단향이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선균 도련님이 좋으십니까?”

“응.”

“아기씨가 도련님 몰래 그 집 앞에까지 갔던 거 제가 말씀드릴까요?”

“너! 그러기만 해봐! 가만 안 둘 것이야!”

별이의 앙칼진 호통에도 단향이는 입만 삐죽였다. 사실 며칠 전 이른 아침, 등청하는 선균을 보기 위해 새벽같이 마님 몰래 홀로 집을 나서던 별이를 따라나섰던 단향이는 지금처럼 선균의 모습에 홀딱 반해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아기씨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리도 좋으실까.’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푸른 관복을 입고 말에 오르는 선균을 보자 막상 나서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담장 뒤로 숨어버렸던 별이를 보면서 단향이도 지금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별이 그동안 잘 지낸 것이냐?”

그제야 별이에게 시선을 주며 웃으며 다가오는 선균의 모습에 별이의 굳어졌던 표정도 사르르 풀어졌다.

“몰라요!”

“우리 별이가 단단히 마음이 상했나 보구나! 예쁜 얼굴이 어찌 그리 굳어있는 것이야?”

‘예쁜 얼굴?’

선균의 말에 별이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할 기쁨이 노골적으로 뿜어 나왔다.

“칫! 이제야 저를 봐주시는 겁니까?”

“이제서라니! 나는 아까 전부터 별이 너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거짓말 마셔요!”

어린아이처럼 토라져 있는 별이를 보며 선균은 마냥 다섯 살배기 막내 여동생을 대하듯 토닥였다.

“자! 여기 네 선물!”

“선물이요?”

그의 손에는 어여쁜 백옥과 산호로 꾸며진 매듭에 작은 은장도가 달린 노리개가 놓여 있었다.

“너무 예뻐요! 오라버니!”

“그렇지? 마음에 드느냐? 작긴 해도 은장도는 위험하니 항상 조심하고.”

“그럴게요! 너무 예쁩니다! 저잣거리에서 보지 못한 물건이에요. 어디서 구하셨어요?”

“내 특별히 너 주려고 부탁해서 구한 거란다.”

사실 선균은 별생각 없이 퇴청하는 길에 빈손으로 오는 것이 머쓱하여 육조거리 상인에게 열네 살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 물었고 상인은 요즘 제일 인기가 좋다는 은장도 노리개를 권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