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온반

풍경 소리와 함께 다섯 살을 며칠 앞둔 설아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온반에 들어섰다. 매일 이 시간이면 출석부에 도장을 찍듯 들어와 동그란 눈동자를 굴리며 실내를 두리번거린다.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사랑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던 캐릭터와 거의 흡사했다. 그 귀엽고 앙증맞은 아이는 항상 할머니와 함께였다.

“설아야! 오늘은 어떤 반찬으로 할까?”

“…….”

할머니의 물음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반찬 냉장고 너머를 보겠다고 작은 발을 치켜세웠다.

“장조림으로 할까? 너 멸치볶음 좋아하니까 이것도 하나 사자.”

냉장고 문을 열어 포장된 반찬을 꺼내 든 혜선은 설아가 누굴 찾는지 잘 알고 있었다. 꼭 반찬을 산다라기보다 설아 때문에 들른다는 표현이 맞았다. 생전 곁을 주지 않는 아이가 유독 반찬 가게 사장에게만은 예외였다.

이 건물에 반찬 가게 온반이 들어온 지는 2년이 되었다.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고 점점 손님이 늘어나 급기야 택배가 하루에 50건이 넘었다. 엄마와 단둘이 하던 가게에 친구까지 같이 일하는데도 손이 모자랐다.

“오늘 설아가 예쁜 원피스를 입었네!”

사장으로 있는 민주의 친정 엄마 연서가 알은척을 해도 오직 설아의 시선은 잘 보이지 않는 주방으로 향해 있었다. 연서도 설아가 왜 이러는지 알지만, 바쁘게 일하는 민주를 부르기가 멋쩍었다. 설아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듯 주방 문이 열리고 하얀색 유니폼에 두건을 슨 민주가 나오자 설아는 혜선의 손을 뿌리치고 민주에게 달려가 안겼다.

“설아 왔구나. 어쩐지 나오고 싶더라. 아줌마도 설아가 보고 싶었나 보다.”

민주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설아를 안아 들고는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앙증맞고 깜찍한 아이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면 꼭 모녀인 줄 착각할 정도로 설아는 민주만 찾았고, 민주 역시 그런 설아를 살뜰히 챙겨 주었다.

아침에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둔 호박식혜를 컵에 따라 혜선에게 건네고 설아는 직접 먹여 주기까지 한다.

“오늘 설아는 어린이집 재밌었어?”

주먹만 한 머리가 연신 식혜를 삼키며 끄덕였다. 설아를 알게 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사연이 있지 싶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민주는 설아를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항상 설아 옆에는 할머니 혜선이 있었다.

처음에는 곁을 주지 않던 아이가 매일 말을 걸어오는 민주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 계기가 그녀가 생일날 만들어 준 캐릭터 케이크 때문이었다.

작년 이맘때에 혜선은 아이의 생일인데 특별한 걸 해주고 싶은데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았다. 원래는 반찬만 만들어 팔았는데 처음으로 아이의 생일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네 살 여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인터넷을 뒤지고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모아서 설아에게 일일이 보여주며 좋아하는 것을 추려냈다. 그러면서 설아가 좋아하는 것도 알게 되고 식성까지 파악하게 되었다. 아마도 설아에 대해서 민주만큼 아는 사람도 없을 거 같다.

“설아가 사장님 시간을 빼앗아서 어째요?”

혜선이 매일 하는 인사말이다. 오지 않으려 해도 설아는 할머니 손을 잡고는 민주를 보고야 비로소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간혹 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기도 했지만, 민주가 할머니인 혜선보다 설아를 잘 다루었다.

“저도 쉬는 시간이에요. 예쁜 설아 보면 피곤이 가시는걸요.”

딸을 안쓰럽게 쳐다보는 연서는 목이 메어 왔다. 자기 자식도 아닌 아이를 저렇게 예뻐하는데… 결국 눈물이 핑 돌아 주방으로 들어갔다.

민주는 연서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몸 고생, 마음고생만 하고 아이를 떠난 보낸 딸아이가 불쌍해 민주 모르게 흘린 눈물이 장맛비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거다.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눈가에 맺힌 이슬까지 닦아내고 매장으로 나갔지만 여전히 설아는 민주 품에 안겨 있었다. 매정하게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염치없이 매일 데리고 오는 혜선이 얄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말은 설아가 민주가 만든 반찬만 먹는다고는 하지만, 매일 이럴 때마다 연서는 가슴이 턱 막혀 왔다.

직원처럼 같이 일하는 정아는 주문 들어온 것들을 인쇄하고, 주소까지 출력해 민주의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주문이 많이 늘었는데 너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

“네가 도와주면 가능하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음식 만드는 거하고는 친하지가 않아서.”

“쪽파만 다듬어 주면 돼. 요즘 파김치가 맛있을 때잖아.”

“맞아. 파김치 주문이 폭주해.”

민주 품에 안겨 있던 설아가 다리에 힘을 주며 오므린다. 그걸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민주다.

“설아, 소변 마려우니?”

고개를 끄덕이니 혜선이 화장실을 데려가기 위해서 다가서자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그러고는 민주만 쳐다본다. 민주는 싱긋 웃으며 설아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 틈을 타 연서가 혜선에게 물었다.

“설아는 할머니가 키우시는 거예요?”

“…네. 주중에는 여기 있고, 주말에는 할아버지가 있는 양평으로 가요. 매일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해요. 유독 여기 사장에게만 곁을 주니 나도 민망해요. 여기를 들르지 않고는 집에 가지 않으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

차마 설아 부모님이 있기는 한 거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겉으로 평화로워 보여도 사연이 없는 집이 없으니 설아네도 사연이 있겠지. 그런데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그런데 설아 집에서는 말하는 거죠?”

“…아니요. 그게….”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어와 대화가 끊겼다. 그만 설아를 데리고 집으로 가야 되는데 사장하고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 연서의 눈치가 보였다.

몇 차례 손님이 들고나고 하더니 배시시 웃으며 설아가 민주와 함께 가게로 돌아왔다.

아이의 손에는 풍선으로 만든 푸들 강아지가 들려 있었다.

“설아야! 아줌마와 약속한 거 잊으면 안 돼!”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혜선의 손을 야무지게 잡았다. 혜선이 고른 반찬을 계산하려는데 민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아 때문에 일부러 사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 게 아니에요. 물론 설아 때문에 미안하기도 하지만, 설아도 그렇고 아들도 여기 반찬을 좋아해요.”

“잠시만요.”

민주는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설아가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가지고 나왔다.

“이거 설아 주세요.”

“고마워요. 이러니 설아가 사장님을 좋아하죠.”

“안녕히 가세요. 설아도 안녕!”

민주가 손을 흔드니 설아도 손을 흔들며 가게를 빠져나갔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거야?”

연서의 뾰족한 말투가 민주의 가슴을 할퀴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엄마 눈에는 딸의 마음이 전해지는가 보다. 말하지 않아도 내색하지 않아도 속은 썩어 곪고 있었다.

말없이 주방으로 들어가는 딸을 보니 마음이 천 갈래로 찢겨 나간다.

“아줌마! 민주 마음은 오죽하겠어요. 그래도 이 가게 하면서 많이 좋아졌잖아요. 설아를 보면서 위안 삼는 거 같기도 하구요.”

“지 배 아파서 낳은 자식도 아닌데 마음을 주면 어떡하자는 건데!”

“민주가 그걸 모르겠어요. 그 아이가 떠난 날이 다가오니 설아가 더 마음이 쓰였겠죠. 그리고 설아가 말을 안 하니 더 신경이 쓰이는 거 같기는 해요.”

“내가 속이 터져서 못 살겠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먼저 퇴근하세요. 저는 민주와 같이 가게 문 닫고 들어갈게요.”

“그럴래?”

“네.”

만들어 놓은 반찬이 일찍 다 팔리고 7시가 되어 가게 문을 닫았다. 정아의 성화에 못 이겨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놓고 마주 앉았다.

하루의 고단함이 씻길 거 같다면 단숨에 반이나 비워내는 정아를 보며 민주는 피식 웃었다.

“땀 흘리고 먹는 생맥주는 보약이야!”

“뭔 땀을 그렇게 흘렸다고 그래. 누가 보면 땡볕에서 노동한 줄 알겠다.”

“너는 모른다. 내 헛헛한 마음을.”

“결혼 때문에 부모님이 잔소리하셔?”

“아주 귀에 딱지가 앉게 생겼다니까! 나만 보면 따따따 따발총 쏘는 것처럼 결혼 얘기만 해. 누구는 아기를 낳았다더라. 누구는 결혼한다더라. 너만 왜 그러고 있냐고. 누구는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나 사람이 없는걸.”

“결혼 생각 있으면 선이라도 봐.”

“싫어. 우연히 만나는 게 좋지. 결혼을 전제 조건으로 만나는 거 자체가 나는 싫더라. 그냥 조건 맞으면 하는 거잖아.”

“우연히 만나 결혼해도 깨지잖아. 이 사람 아니면 안 될 거 같아 결혼해도 결국에 헤어질 사람은 헤어져.”

민주의 목소리가 우울했다. 3년을 연애하고 4년의 결혼 생활을 치를 떨며 종지부를 찍었다. 결혼이란 둘만 좋아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아무리 사랑해도 주변에서 훼방을 놓으면 절절했던 사랑이 식어 간다는 것도 경험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변한다고 말하고 싶다. 결혼이란 한순간 신뢰가 깨지는 순간 지옥으로 변한다. 결혼이 지옥이라는 걸 결혼 후 6개월이 지난 후 깨달았다. 그곳을 탈출하는 데 3년이란 시간을 허비했다. 남편의 사랑은 한결같은데 그 사랑을 담아 두면 둘수록 점점 지옥의 늪에 빠져들었다.

과거의 기억에 붙잡혀 있는 민주를 정아가 현실 세계로 꺼냈다.

“너 또 지나간 일 생각하는구나. 이러니 내가 네 옆에서 결혼 얘기를 못 꺼낸다니까!”

“그런 거 아니야.”

이제 사람 구실하면서 사는데 과거에 묶여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의 배 속에 머물다 간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민주는 남들보다 두 배, 세 배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며칠 후.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웹툰 작가 혁준은 와인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거의 작품이 끝나 가 막바지 작업이 한창인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시선은 모니터를 향한 채 전화를 받았다.

“네. 진혁준입니다.”

-나다.

“엄마! 저 지금 바빠요!”

-야! 나도 바빠. 나 지금 양평으로 가야 해! 아버지가 다리를 다치셔서 응급실에 실려 갔대. 그러니 설아 올 시간 되면 어린이집 버스 정차하는 곳에 기다렸다가 집으로 데리고 가. 3시 30분이니까 늦으면 안 돼!

“…….”

모니터를 보며 말풍선을 다느라 정신이 팔렸다.

-혁준아! 내 말 들은 거야?

“…네. 들었어요.”

-너 잊으면 안 된다. 3시 30분.

“네.”

전화기 너머에서 혜선의 목소리가 한동안 이어졌지만 혁준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말풍선을 다는 중에도 3시 30분이라는 혜선의 말이 떠올라 연신 시간을 확인하니 집중력이 떨어졌다. 마침 시간이 다 되어 가 빠르게 건물을 빠져나가 엄마들이 서 있는 곳에 합류했다.

매일 할머니가 있었는데 젊은 남자가 서 있는 걸 곁눈질로 쳐다보는 엄마들이다.

혁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으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눈으로 훑었다.

엄마들의 움직임에 시선을 들었지만, 설아가 다니는 어린이집 버스가 아니라 다시 고개를 숙였다.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의 쫑알대는 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버스가 정차했다.

선생님 손에 이끌려 설아가 버스에서 내리자 혁준이 다가섰다.

“설아야!”

설아의 손을 잡고 선생님께 묵례하는데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배꼽 인사를 하지 않는다. 말은 안 하더라도 인사는 했던 아인데.

버스가 떠나자 혁준이 설아를 안았는데 내려 달라고 몸을 비튼다.

혁준이 설아를 바닥에 내려놓자 바로 어디론가 걸어가는 설아를 따라 혁준도 빠르게 걸었다.

“설아야! 어디 가!”

뒤도 안 돌아보고 성큼 걸어서 같은 건물에 있는 반찬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길래 매일 혜선과 같이 다녀오는 반찬 가게라는 생각이 들어 따라 들어갔다.

바로 설아의 키에 맞춰 혁준이 다리를 접고 앉았다.

“설아야! 오늘 무슨 반찬 먹고 싶은데.”

대꾸도 없이 오늘도 반찬 냉장고 너머의 주방을 쳐다보니 혁준의 시선도 그리로 향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니 연서가 설아에게 다가왔다.

“설아야! 오늘은 아줌마가 안 계시는데.”

순식간에 설아의 둥그런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연서도 당황스러웠다.

“설아야! 왜 그래!”

다른 아이들처럼 울음소리도 내지 않은 채 닭똥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혹시! 설아 아빠 되세요?”

“네.”

“할머니는 같이 안 오셨어요?”

“네. 집에 일이 생겨서 당분간은 못 오실 거예요. 그런데 설아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아빠라는 사람이 설아가 매일 반찬 가게에 들러서 무슨 짓을 하는지 당연히 모르겠지. 아빠가 맞기는 한 건가. 혁준이 설아를 안으려 해도 뿌리치며 냉장고에 바짝 붙어서 울기만 한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혁준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풍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민주가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들어서자 설아는 바로 달려들어 원피스 자락을 움켜잡았다. 원피스 자락이 펄럭이며 무릎 위로 올라가 허벅지까지 보이자 혁준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아의 행동에 놀라 얼음처럼 굳은 혁준은 원피스 자락이 올라가 안에 입은 속치마가 보여도 놀라지 않는 민주를 보고 더 놀라웠다. 보통 이럴 땐 황당해하며 아이의 손을 떼어내기 마련인데 전혀 놀라지 않고 보일락 말락 미소를 지은 채 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설아야! 울었어?”

작은 머리통이 끄덕이니 민주는 무릎을 접고 앉아 아이와 눈을 맞춘다. 가방을 열어 손수건을 꺼내 꼭꼭 찍어 눈물을 닦아내고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는 행동까지 놀라움에 연속이었다. 아이 아빠보다 설아를 잘 다루는 여자를 보며 혁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울어서 예쁜 얼굴이 다 망가졌네. 아줌마와 우유 마실까?”

설아는 머리를 끄덕이며 민주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런 설아를 안아 올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소파에 앉히고는 냉장고를 열어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아 설아 앞에 놓아 준다.

그런 행동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혁준의 눈빛이 놀라움에 연속이었다.

설아가 누구의 아이인지 헷갈릴 정도다. 설아의 저런 친밀함은 아빠인 혁준에게도 보여주지 않아 멍한 시선이 꼭 뭐에 홀린 거 같다.

그런 혁준을 기민하게 바라보는 연서였다. 민주와 설아의 행동을 보자면 누구나 모녀라고 생각할 텐데 아빠가 저런 모습을 처음 봤다면 놀라는 게 당연했다.

“저리 가 앉아요.”

“…네?”

“설아 옆에 가 앉으시라고요. 여기 오면 30분은 어르고 달래서 집으로 돌아가요.”

혜선이 푸념하는 소리를 듣긴 들었다. 아빠와 할머니보다 설아를 더 잘 다루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 바쁜 사람 시간을 매일 빼앗아 미안해 죽겠다는 얘기를 매일 들었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죄송합니다.”

민주에게 오늘은 악몽 같은 날이다. 배 속에서 8개월을 함께했던 아이가 떠난 날이라 몸도 마음도 지치는 날이기도 했다. 한 번의 유산과 한 번의 사산을 한 민주는 한동안 우울증을 앓았었다. 그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해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을 만들기로 해 온반을 오픈했는데 몸은 힘들어도 일하는 동안은 정신이 맑아졌다.

그런 딸이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을까 연서는 매일 노심초사였다. 같이 살려고 해도 혼자 살아 보겠다고 하더니 떡하니 반찬 가게를 오픈해 나름 잘 이겨낸다 생각했는데 설아에게 애정을 쏟는 것이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거 같다.

힐끔 눈치를 보며 혁준이 민주와 설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인기척에 민주의 시선이 혁준에게 향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설아 아빠인데 인사가 늦었어요. 진혁준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머니께 말씀은 들었어도 설아가 이 정도로 매달릴 줄은 몰랐습니다. 매일 바쁘신 분 시간 뺏는다고 걱정이 많으셨는데 고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빠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얌전히 우유를 마시던 설아가 인상을 구기더니 울상이 되었다.

설아의 유일한 행복은 어린이집 다녀와서 민주를 만나는 시간인데 그것을 앗아 간다니 불안한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민주와 떨어지기 싫어 다시 원피스 자락을 움켜잡는다. 혁준의 눈에 조금 전에 설아가 잡아서 원피스 자락이 구겨져 있는 게 보이는데 다시 그런 행동을 하니 인상이 험악하게 변했다.

“설아야! 옷 구겨지잖아!”

다소 큰 목소리에 설아는 물론 민주까지 놀랐다. 움츠리는 설아를 한 손으로 감싸고 민주는 혁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아의 아빠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혜선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였다.

짙은 눈썹에 날카로운 눈매에 날렵한 턱 선은 누가 봐도 차가워 보였다. 아이 아빠라면 적어도 설아와 한집에 살고 있을 텐데 아이를 이렇게 다루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제넘게 얘기할 형편도 아니었다. 민주가 차분하게 설아에게 설명했다.

“설아야! 아줌마가 입은 이 옷 예쁘지?”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민주를 향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 예쁜 옷이 설아가 잡아서 여기 구겨진 거 보이지?”

눈물이 또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리며 고개를 또 끄덕인다.

“이거는 설아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야. 설아는 잘 모르고 한 일이잖아. 앞으로는 옷을 잡는 것보다 아줌마 손을 잡아 줄래? 그러면 아줌마가 더 예뻐 보일 거 같은데 네 생각도 그래?”

설아는 머리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설아는 똑똑하네. 말귀도 잘 알아듣고,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무슨, 놀이하며 놓았어?”

습기를 머금은 눈이 금세 반달이 되어 등에 메고 있던 작은 가방을 열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민주 앞에 펼쳐 놓았다.

종이에는 여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다. 단번에 그 그림의 주인공이 민주와 설아라는 걸 알아차렸다.

혁준도 웹툰을 그리는 작가인데 아무리 그림을 못 그렸어도 누굴 그렸는지 짐작이 갔다. 씁쓸함이 가슴을 에워쌌다. 이건 설아의 잘못도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설아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못한 혁준의 잘못이 컸다.

민주가 설아를 달래는 것처럼 혁준은 못 할 거 같았다. 그렇다고 이곳에 매일 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혁준은 힐끔거리며 미소 짓고 있는 민주를 훑어내렸다.

백옥처럼 하얀 피부에 색조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빼어난 미모였다. 작은 얼굴에 깊은 쌍꺼풀에 오뚝한 코에 앙다문 입술은 세상 풍파를 전혀 느끼지 않은 모습이었다. 단정하게 내려뜨린 긴 생머리가 그녀를 20대 중반으로 보이게 했다. 160이 조금 넘는 키에 날씬 몸매라 아직 결혼하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드는데 설아를 다루는 모습은 영락없는 엄마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