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결벽증인 그놈Ⅰ''''''3월초의 날씨라서 아직은 쌀쌀한데도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볍게 바뀌어 가고 있는걸 보니 봄이 오긴 했나 보다. 어떤 사람에게는 쌀쌀한 아침 출근길이 고역인 사람도 있지만 직장이 없는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부러운 광경이기도 했다. ''“휴. 다들 아침부터 바쁘게 나가는구나. 난 언제쯤 출근이란 걸 하려나.”''그녀는 오피스텔 창문을 통해 한없이 부러운 눈초리로 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때 집안 탁자에 올려져 있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 댔다.''‘어휴. 아침부터 누가 나의 불편한 심기에 전화벨을 울려 대냐?’''“여보셔. 너의 정체를 밝혀라.”''“아침부터 쑈를 해라. 기지배야.”''“윤정이냐?”''“그럼 이 아침에 누가 널 찾아 주겠어?”''“쉰 소리 하지 말고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우리 백수 친구께서 요즘 뭐하고 지내시나 해서 전화해 봤어.”''그녀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윤정이 아침부터 그녀의 심기를 긁어 놓았던 것이다.''“철들었다. 남의 근황까지 살펴볼 줄도 알고.”''“내가 언제는 안 그랬니?”''“용건이나 말하셔.”''“기지배야 네가 그렇게 틱틱 대니까 회사에서 짤린거야.”''“뭐야? 아침부터 염장 지르려고 전화 했으면 그만 끊자.”''참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찡그려지며 윤정 에게 소리를 질렀다.''“점심때 나와.”''“왜?”''“점심 사줄게.”''“됐다. 직장 있는 너나 많이 드세요.”''“정숙 이도 나온다고 했어. 나와.”''“정숙 이도? 무슨 일 있어?”''정숙 이도 나온다는 윤정 의 말에 찡그려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펴졌다.''“일은 무슨. 그냥 점심이나 먹자고.”''“흠흠, 정숙 이를 봐서 바쁜 내가 시간을 내보도록 할께.”''“췌. 고마워서 눈물나려고 한다. 내가 밥 사면서 이렇게까지 애원조로 해야 되는 거니?”''“시끄러운 소리 하지 말고 어디로 가면 되는데?”''“우리 회사 앞으로 와.”''“알았다.”''그녀는 전화를 끊으며 입을 삐죽였다.''‘췌. 기지배 큰 회사 다닌다고 사람 기죽이는 거야. 뭐야?’''그녀와 정숙 그리고 윤정 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단짝 친구이다. 윤정 은 조금 깍쟁이 같은 면과 바람녀 기질을 타고나서 그녀와 만나기만 하면 말다툼을 하지만 그래도 친구 관계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를 몇 개월에 한번씩 갈아 치우며 연애를 하는 윤정 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다. 그만큼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2달 전 다니던 직장에서 짤리고 아직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마음먹고 찾아보자는 생각이었지만 2달이 지나도록 직장을 구하지 못하자 슬슬 불안한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집을 대충 정리하고 준비를 하다가 문득 시골로 내려가 계시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줄곧 서울에 함께 계시다가 서울 생활을 청산 하시고 집을 팔아 시골에 땅과 집을 마련했고 남은 돈으로는 그녀에게 이 오피스텔을 사주고 내려 가셨다. 그녀는 전화를 들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자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아빠?”''“은경이냐?”''“네. 뭐하고 계셨어요?”''“잠깐 밖에 좀 나가 보려고 했다.”''“왜요?”''“이제 봄이 오니까 이것저것 손도보고 야채도 좀 심어 볼까 하고.”''그녀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온유한 성품을 지니신 분이었고 가족을 사랑하는 자상함을 지닌 분이셨다. ''“그런걸 뭐하려고 하세요! 그냥 좀 사다 드시지.”''“아니다. 무공해로 이렇게 해먹으니까 아주 좋아.”''“어디 불편 한곳은 없으세요?”''“나야 건강하지. 넌 잘 지내고 있어?”''“그럼요. 곧 직장도 잡을 거예요.”''“그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한걸음 쉬어 간다 생각하고 구해.”''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아버지에게 항상 죄송한 마음뿐이었다.''“네. 그렇게 할게요. 언니는 자주 전화해요?”''“민경이? 민경 이도 자주 전화하고 박 서방도 자주 전화하니까 걱정하지 말거라.”''“그래요? 아빠 조만간에 한번 내려갈게요.”''“피곤한데 뭐 하러 그래?”''“뭐가 피곤해요. 핑핑 놀고 있는 백수인데. 헤헤.”''엄마가 돌아가셨기 때문인지 그녀의 아버지는 항상 엄마의 몫까지 걱정을 두 배로 하셨다.''“사람이 신경 쓰는 것만큼 피곤한 건 없다. 나는 신경 쓰지 말거라.”''“아빠는! 우리 아빠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아빠는 나 신경 안 쓰여요?”''“그거랑 같아?”''“다를 건 또 뭔데요? 며칠 후에 한번 내려갈게요.”''“그래.”''그녀는 아버지와의 통화를 마치고 한동안 맥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가족은 아버지와, 그녀의 언니 그리고 그녀가 다였다. 언니는 결혼한 지 6개월 정도 된 새댁이었고,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서 아버지를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며 시집가는 날 까지 눈물을 많이 흘렸었다. 갖가지 상념에서 깨어난 그녀는 대충 옷을 입었다.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겉에는 재킷을 입고 야구 모자를 푹 눌러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