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중점적으로

외줄을 타듯 심리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인 남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빈궁은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방을 나갔다. 전과 변함없는 모양새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말이다.

남윤은 방금까지 빈궁이 앉아있던 자리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더운 바람은 빈궁이 남기고 간 잔인하고도 서늘한 기운을 휩쓸고 사라졌다. 말끔히 빈궁의 흔적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윤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도겸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남윤을 쳐다보았다.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연을 지켜본 도겸 역시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빈궁이 회임을 하였다니.

남윤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던 사람이 연이었다. 그런 연이 뒤늦게 이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암울한 분위기를 바꿔 놓기 위해서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입술의 위아래가 딱 붙어버린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적막감은 길어졌고 말을 할 수 있는 좋은 시기는 이미 지나 버렸다. 이젠 어떤 말도 남윤을 위로할 수 없었다.

절망이라는 이름의 바다에 빠져 버린 남윤을 건져 올리기엔 도겸이 가진 위로라는 그물의 길이가 짧았다. 그렇다고 남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도겸이 남윤의 어깨를 잡고 제 쪽으로 돌렸다.

남윤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는 도겸을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짓는 미소라는 걸 도겸이 어찌 모르겠는가.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는 도겸이었다.

“오라버니, 저 괜찮습니다.”

“정말이십니까?”

“단지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남윤은 예상보다 차분하게 말하였다.

도겸이 남윤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저하께 사실인지 물어보겠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겸을 남윤이 제지하였다. 그리고 다시 앉으라는 말을 하였다.

“저더러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입니까?”

“저하께서 해선 안 될 일을 하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하께서는 저하의 의무를 다하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남윤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도겸의 말을 잘랐다.

도겸은 참으려 하는 남윤의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다. 궐에 들어와 쓸데없는 참을성만 늘어난 것 같았다. 그런 건 지나가는 개나 줘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도겸이었다.

빈궁의 회임은 단순히 궐의 경사가 아니었다. 그녀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라도 출산하는 날에는 겨우 다진 남윤의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종이 한 장으로 묶인 허울뿐인 가족은 남윤을 지키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건 남윤의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그런데도 남윤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고 있었다.

도겸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솟구치는 화를 참느라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남윤이 손을 들어 눈앞의 도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저하께서는 저를 배신하실 분이 아닙니다. 저는 저하를 믿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누굴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마.”

“빈궁마마께서 아들을 낳으실까 걱정인 것이지요?”

“궐은 마마의 생각보다 무서운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습니다.”

“오라버니께서는 잘못 알고 계십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습니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곧 강한 자입니다.”

“마마, 지금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저는 반드시 여기서 살아남을 것입니다.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남윤이 도겸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배에 올렸다.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았지만 작은 언덕처럼 볼록하였다.

도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오라버니께서 걱정하시는 것만큼 저는 약하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저는 마마께서 힘내시라고 다음에 올 때는 국밥을 사 오겠습니다.”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도겸의 노력이었다.

원하는 답을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도겸의 마음을 알아챈 탓인지 그제야 남윤의 얼굴이 풀어졌다.

“아무 데서나 사 오시면 안 됩니다.”

“시전에서 제일 큰 주막에서 사 와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남윤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지만 도겸은 뜻 모를 웃음만 지었다.

*****

날이 갈수록 빈궁의 까탈스러움은 심해졌다. 특수한 상황임을 아는 궁녀들도 처음엔 이해하였지만, 점점 지쳐갔다.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빈궁은 사람을 질리게 하였다. 빈궁의 행동이 도를 지나쳤다는 이야기가 빈궁전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궁녀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를 듣고 달래는 것은 오로지 조 상궁의 몫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빈궁을 모시는 궁인이었던 조 상궁의 불만은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오르는 빈궁과 다르게 조 상궁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두 볼은 볼품없이 쏙 들어갔다. 얼굴은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푸석거렸다. 언제부턴가 입술엔 항상 하얀 거스름이 일어 있었다.

빈궁이 동그랗게 부픈 배를 문지르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복도에 시립해 있던 궁인들이 다들 못 들은 척하며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만 하였다. 다들 한 마음으로 빈궁의 부름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또 꼬투리를 잡으실까. 어떤 고약한 말로 사람 가슴에 비수를 꽂을까. 이번엔 무엇이 먹고 싶다고 하시어 대령하라고 하실까.

빈궁에게 가야 한다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들이었다. 아무도 나서지를 않은 채 시간만 지나갔다.

빈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금 문간을 타고 넘어온 것은 그때였다. 이젠 정말로 누군가 빈궁의 비위를 맞춰 주어야만 하였다.

구원을 바라는 눈길로 궁인들이 조 상궁만을 바라보았다. 조 상궁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십 개의 눈빛에 싫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조 상궁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빈궁마마, 부르셨습니까.”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느냐? 왜 이렇게 늦게 답을 하는 것이냐?”

빈궁이 화를 낼 때는 무조건 잘못했다며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돌풍이 지나갈 때까지 절대 고개를 들어서는 아니 되었다. 요근래 조 상궁이 터득한 계책이었다.

“죽여주시옵소서. 마마.”

돌연 조 상궁이 곡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며 어깨를 덜덜 떨었다. 이마가 방바닥에 닿도록 조아렸다.

제 앞에서 사람들이 꼼짝 못 하는 상황을 빈궁은 즐겼다.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런 빈궁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어도 조 상궁은 그녀가 이 상황에 만족했다는 것을 등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섬뜩하던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엎드린 상태로 조 상궁이 고개만 들어 빈궁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마마.”

아직 긴장의 끈을 놓기엔 일렀다. 조 상궁은 일부러 말을 더듬으며 빈궁에게 물었다.

“세자 저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후원을 산책 중이시라 합니다.”

“이리 더운 날에 말이냐?”

연을 만나고는 싶었지만,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주룩주룩 흘리기 싫었던 빈궁이다. 여느 날과 다르게 시간을 보내는 연이 못마땅하였다.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조 상궁이 마른 침을 조심스럽게 삼켰다. 뜻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는 것을 이유로 불벼락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빈궁이 둥근 원을 그리며 배를 쓰다듬었다.

“산책 나갈 채비를 하여라.”

이렇게 더운 날은 시원한 곳에 앉아서 더위가 물러나길 기다리는 것이 최고였다. 더군다나 뱃속에 아이가 있다면 더더욱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았다.

조 상궁은 어떻게 하면 빈궁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분명 좋은 방법이 있을 터였다.

빈궁의 성화에 조 상궁은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조 상궁이 몸을 일으켜 빈궁에게 다가갔다. 부쩍 몸이 무거워진 빈궁을 부액하는 일은 이젠 조 상궁에게조차도 버거운 일이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수가 없어서 이를 악물고 빈궁을 일으켰다.

빈궁은 허리를 뒤로 비스듬히 기울여 배가 더욱 볼록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

평소와 다른 일을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조 상궁은 그걸 몰랐을 뿐이었다. 연은 뜬금없이 산책하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산책길에 나선 것이었다.

연이 한가로이 후원을 걷는 같은 시각.

남윤은 양 상궁의 도움을 받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어디라고 하였는가?”

“후원에서 세자 저하께서 마마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슨 일 때문에 부르시는 것이라고 하던가?”

“그건 잘 모르옵니다. 마마께서 직접 와보시면 알게 되신다고만 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연의 부름에 남윤은 어리둥절하였다. 빈궁이 회임을 하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만나기 힘든 연의 얼굴이 더욱더 보기 힘들어졌다.

연은 남윤과 빈궁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였다. 저울의 추가 누구 한 사람을 향해 기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