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출발해 대한민국 인천 공항에 도착하는 비행기 안은 인종, 국적, 나이 불문한 수많은 이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여행을 목적으로, 또는 일을 목적으로 착석한 사람들의 얼굴엔 묘한 기대감과 흥분이 가득했다.'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웬만한 사람들은 굽어 살필 것처럼 큰 키에 마네킹으로 오해할 만큼 완벽한 비율, 멀리서도 한눈에 띄는 얼굴을 가진 남자는 이코노미석이 불편한지 구겨진 얼굴로 몸을 뒤척였다. 어깨도 제대로 펼 수 없을 만큼 좁은 좌석에 다리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좁은 폭, 거기다가 귀를 틀어막고 싶을 만큼의 시끄러운 소음이라니. 거기까진 어떻게든 마지막 인내력으로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으로 보이는 탑승객들이 수군대며 자신을 흘깃대고 있는 것만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윤정호 맞지?”'“맞는 거 같은데?”'수군대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어느새 시끄러워졌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정호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부산스러운 상황이 아니라 비즈니스석의 안락한 의자와 평온한 분위기였다.'“너 선글라스라도 쓰지 그러냐?”'뒷좌석에 앉아 있던 매니저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화보 촬영이라도 하듯 꼼짝도 않던 정호의 서늘한 눈동자가 옆을 향했다. 자신에게 닿지 않았지만, 정호의 시선이 어떨지 빤히 보이는 매니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옆자리에 앉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다른 사람 눈에 띄는 건 겁나나 보지?”'“야, 미리 예약 못 한 건 미안한데, 일찍 했어도 똑같았어. 알잖아, 성수기라서 좌석 없는 거.”'올 시즌 화보 촬영을 위해 뉴욕에 왔다 귀국하는 날 한국행 티켓 예약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땐 이미 평소 앉아가는 비지니스석도 만석이었고, 이코노미석은 당연히 더 구하기 어려운 성수기였다. 다음 스케줄을 위해 매니저가 발바닥에 불을 내면서까지 어렵사리 공수한 표가 현재 정호가 앉은 자리였다. 당연히 비니지스석조차도 불편해하는 귀한 몸인 정호의 심기는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더군다나 유난히 미국을 싫어하는 정호로썬 이 사실에 평소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다.'정호의 반듯한 미간이 좁아지며 눈동자가 더욱 가라앉았다.'“그러니까 더 일찍 예약했어야지. 표 예약 담당 누구야?”'“내가 하려고 했는데 일이 꼬여서 코디한테 부탁했지.”'“걔 잘라 버려.”'날이 선 말에 베인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매니저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몇 년을 함께해도 이렇게 차분한 말투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때면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매니저는 몇 년의 내공으로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진정 좀 해. 올해만 해도 코디가 벌써 몇 번째 바뀐 줄 아냐? 승훈이는 자기가 하겠다고 날뛰고 다른 사람은 구해지지도 않고.”'“구해. 그게 형 일이잖아.”'“그래. 그게 내 일인데 쉽지 않다니까? 그그리고 지금 코디처럼 착한 애 없어. 너 같은 녀석 성격 다 받아주고, 이번에도 봐라. 너 먼저 가라고 기꺼이 자리도 양보해 줬잖아.”'“그럼 걔가 먼저 가고, 내가 뉴욕에서 언제 날지 모르는 표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을까?”'매니저는 유구무언이었다. 스타일리스트를 먼저 보내고 연예인을 후에 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정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매니저는 곧 이륙을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러다 정호를 대놓고 쳐다보는 여자들 무리를 보며 매니저는 슬그머니 좌석 틈에 입을 내밀었다.'“선글라스라도 끼지 그러냐. 이제 백인들까지 너 쳐다본다.”'“어디서 본 놈이다 싶겠지.”'“흑인도 쳐다봐. 사진기 꺼내드는데? 뭔가 싶나 봐. 아닌가? 널 알아본 거 같기도 하는데? 그러니까 선글라스…… 윽!”'매니저는 무언가가 강타한 머리통을 감싸 쥐고서 바닥을 보았다. 작년 한정판으로 나온 세계에 몇 없는 고가의 선글라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닥치고 너나 써라’라는 삐딱한 뜻을 담고 정호가 던진 선글라스를 보며 매니저는 속으로 탄식했다. '저 고집을 꺾을 이, 세상에 존재는 하는가! 라며.''*''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누군가가 옆자리에 착석하는 소리와 스튜어디스의 안내방송을 들었지만 정호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며칠간 빽빽한 스케줄 때문에 쌓인 피로가 온몸을 무겁게 누르고 있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얼마나 잤을까. 정호는 거대한 통나무에게 무참히 깔려 학살당하는 꿈을 꾸었다. 덕분에 잠들기 전보다 더한 피로감을 느꼈다. 굳은 몸을 풀려고 허리를 곧추세우던 정호가 이내 행동을 멈췄다. 스튜어디스가 덮어준 담요 위에 자신의 몸이 아닌 무언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짙은 회색의 천으로 감긴 굵고도 긴 장작 같은 것이, 회색 바지를 입은 사람 다리라는 것을 깨닫는 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꿈에서 자신을 학살한 통나무 중 하나리라. 회색 바지를 따라 정호의 시선이 차츰차츰 위를 향했다.'다리는 자신에게, 머리는 복도 쪽에.'꿈에서 허들이라도 넘는 것일까. 이 기하학적인 자세는 뭐란 말인가.'이런 잠꼬대를 하는 사람이 존재하다니, 무려 이런 잠꼬대를 하는 사람이 여자라니, 거기다가 감히 자신의 배 위에 이런 무자비한 다리를 올려놓다니.'문화 충격에 빠진 정호는 황당한 표정으로 잠에 빠진 동양인 여자를 쳐다보았다.'아무리 좋게 봐도 트레이닝복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회색 옷차림에 누더기로 보이는 조끼, 검은 단화에 보라색 모자라니.'어디 하나 통일성 없는 옷차림은 누가 봐도 패션에 수류탄을 던진 패션 테러리스트였다.'“형.”'모두가 잠든 기내 안, 정호가 조용히 뒷좌석에 앉아 있는 매니저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 정호는 조심스럽게 다시 매니저를 불렀다.'“형.”'그러나 이미 의식을 저 먼 세계에 던져놓은 매니저가 반응할 리 없었다. 매니저를 포기한 정호는 다시 한 번 시선을 돌려 앞의 여자를 보았다. 언제나 차분할 것 같은 정호의 눈동자가 눈앞의 정체 모를 여자를 보며 가늘게 흔들렸다.'망명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탈북인가. 그것도 아니면…… 제3세계에서 유행하는 패션인가.'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정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끝으로 조심스레 자신의 배 위에 놓인 회색 트레이닝복 끝을 잡았다. 한참을 잡아당기던 정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옷만 늘어날 뿐, 다리는 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대체 찰떡처럼 무한히 늘어나는 이 재질은 뭐란 말인가! 모델로 활동한 경력 탓에 수많은 옷을 다 입어본 정호도 이런 재질은 처음이었다. 평소 성격이라면, 여자의 다리를 집어던지고 무례함에 대한 사과를 받아낼 테지만 그건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 같은 사람에 한해서였다. 이런 감당 안 될 케이스는 최대한 피하는 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끝이 없을 것 같던 트레이닝복은 어느 순간이 되자 늘어나는 것을 멈췄다. 조심스럽게 여자의 다리를 옮겨놓은 정호가 다시 의자에 기댈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