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 여자가 일할 곳이란 학원 밖에 안 남은 것 같다. 나름 박 터지게 공부해서 영문학과에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선택 범위가 너무 좁다. 문득 찾아온 막막한 생각에 내가 읽는 걸 멈추자 엄한 소리가 떨어졌다. '“목소리가 왜 그 모양이야? 똑바로 읽어.”'지금은 수업 중. 영문학과 수업은 말 그대로 빡셌다. '“매일 멍 때리고 시간만 죽이니 실력이 느나? 돈 들여서 학교 보내주는 부모만 불쌍하지. 앉아.”'영어가 막연히 언어 그 자체로 멋있다고 생각해서 영문학과에 들어왔지만 내 실력은 고등학교 이상 늘지 않았다. 문법이나 듣기의 문제는 아니었다. 영어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을 따라잡을 수가 없달까. 벽에 가로막힌 듯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쌓아온 것들을 잃기만 한 것이 오래지만, 나중에 분노하게 될 것 같아서 나는 더 이상 영어에 뭔가를 쏟아 붓고 싶지 않았다. '침통한 얼굴로 자리에 앉자 연후가 내 손등을 힘내란 듯 도닥여 주었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연후는 늘 나를 이런 식으로 격려해왔다. 이런 친구가 없었다면 나을지금보다 더 한심해졌을지도 모른다. 향상심이라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세 시간을 쉬는 시간도 없이 내리 연강한 교수가 강의실을 나가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럴 여유도 없이 지적 받은 부분만 다시 보고 있었다. '“오늘 일하러 간다고 했지?”'연후가 책을 챙기며 물었다. '“……응.”'수업이 끝난 후 학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로 했다. 딱히 가르치는 일에 흥미가 있는 건 아니고 학원 강사로 일하는 친구들이 많기에, 나도 슬쩍 발을 들여 놓아 본 거였다. '“넌 오늘 뭐 할 거야?”'“승하 씨 만날 거야.”'연후의 남자 친구는 ‘씨’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어른이었다.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돌아온 사업가에 집안도 좋고 외모도 훌륭했다.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가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본이랄까.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여자가 그런 남자와 사귀고 있었다면 아무리 무덤덤한 나라도 저건 좀 아닌데,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후는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런 여자는 여자들끼리 예쁘다고 칭찬해서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형수술로도 어렵다. 혈통 같은, 약간 미신적인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연후는 그랬다. '그렇다 보니 나 역시 그저 우러러 보게 될 뿐 질투조차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대로 결혼해서 더더욱 빛나는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허영까지 갖고 있었다. 연후가 종적을 짐작할 수 없는 화려한 데이트를 하러 가는 중에 나는 일하러 가야 된다고 해도 말이다.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연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뭐 할 말 있니?”'“아니.”'“계집애. 실없긴.”'연후가 눈을 흘기며 웃더니 내 팔짱을 다정하게 꼈다. '“너 목 금방 쉬잖아. 호올스 하나 사줄까?”''연후가 사준 보라색 호올스가 무색하게 학원 수업은 빡빡했다. 파트타임이라 썩 큰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될 거라 믿었던 나의 생각은 기우였다. 아이들은 순수하지 않았다. 아니 너무 순수해서 동물적인 건지도 모르지만. 초짜인 내가 빈틈이 있어 보였는지 떠들고 대들고 기어오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고작 네 시간이 10년처럼 길었다. 수업에 대한 지적은 강의실의 CCTV로 할 모양인지 별 질문도 없었다. 수고했다며 가보라는 원감의 말을 듣고 복도를 내려오는 데 허탈했다. '세상에 대한 회의? 그런 거라도 들 줄 알았는데 없었다. 생각 자체가 귀찮았다. 그냥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 뜨면 집에서 화장 지우고 잠든 채였으면 좋겠다는 헛된 망상만 자꾸 들었다. '복도에 멍하니 앉아 있으니 휴대폰이 울렸다. 현호 선배였다. 네 살 많은 내 남자 친구인 그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무테안경을 쓰고 단단하다 못해 땅땅한 몸매를 가졌다. 장점은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는 거고 단점은 키스를 못 한다는 거? 사귀는 사이이긴 하지만 인간적으로 그렇게 친해지진 못해서 정말 애인을 위한 애인이랄까, 그런 사이였는데 그래도 오늘은 지친 상태여서 그런지 반가웠다. '“여보세요.”'저편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여보세요.”'다시 말하자 진지하게 내리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내가 몇 번 전화했는지 아냐?”'나는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네 통이었다. 문자 메시지도 있었다. '“아, 미안. 일하는 중이었어.”'“무슨 일?”'“학원. 그때 얘기했잖아.”'“그게 오늘부터였어? 그럼 말을 해야지.”'“미안. 집에 가서 전화하려고 했어.”'“미안하면 다냐? 하여튼 넌 매일 그런 식이야. 사귀는 사이에 신경 좀 쓰고 살자?”'“……미안.”'남자 친구라고 꼭 기분을 살려주는 건 아니라는 걸 잊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전화를 끊고 싶어졌다. '“일은 어때?”'“……생각보다 힘드네.”'“그러게 왜 하필 학원 강사 같은 걸 하려고 그래?”'현호 선배는 학원 강사를 비정규직의 표본처럼 봤다. 얼마 전 공기업에 취업이 내정되고부터 그런 종류의 무시가 더 심해졌다. 학원 강사도 치열한 전문직이다, 잘나가기만 하면 대기업은 우스울 정도로 돈을 벌 수 있다, 고 말하고 싶지만 문제는 내가 그 말에 안 어울린다는 거겠지. 나는 학원 강사로 잘나갈 자신이 없으니까. 선배가 트집 잡고 있는 것도 학원 강사라는 직업이 아니라 목표 없는 나의 미래성일 터였다.'“나 지금 시간이 좀 비거든. 얼굴 좀 보자.”'“…… 피곤한데.”'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선배가 짜증이 밴 목소리로 말했다. '“야, 솔직히 우리가 매일 보는 것도 아닌데 너 좀 심한 거 아냐? 만나자면 매일 죽는 소리야.”'“내일 시험도 있어. 선배는 이제 졸업이니까 시험이랑 상관없겠지만.”'“시험 너만 치냐? 나도 시험 있어. 중요하고. 그런데도 너 볼 시간은 빼놓잖아. 너 그거 생활 습관의 문제야. 게으르고 나태해서 그런 거라고.”'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약간 떨어뜨렸다. 현호선배는 자기가 만나고 싶을 때 못 만나면 바로 화를 내는 타입이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래. 만나자. 어디로 갈까?”''데이트는 대부분 DVD룸이다. 밥 먹고 바로 거기로 직행한다. 사실 해볼 거 다 해본 연인이 갈 만한 곳은 별로 없었다. 영화는 무조건 긴 걸로 고른다. 시간과 가격 대비 오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긴 영화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예술영화, 아니면 거액을 들인 액션영화. 둘 다 내 취향은 아니다. 나는 유치한 할리우드풍의 로맨스코미디나 잔잔한 일본 영화가 좋았다. 하지만 현호 선배는 로맨스코미디는 돈 낭비라고, 일본 영화는 어딘가 정서가 안 맞는다고 싫어했다. '오늘 선택된 영화는 다크나이트. 러닝타임이 2시간이 넘는 거였다. '등장인물이 간신히 다 등장했을까 싶은 초반. 현호 선배가 나를 눕히더니 키스를 했다. 사귀고 1년이 다 돼가다 보니 키스에 조심성 같은 건 없다. 입가가 타액으로 범벅이 되고 침 비린내가 피어오르는, 혀를 목까지 쑤셔 넣는 키스다. 눈을 감으면 지렁이 굴에 빠진 느낌이라 나는 차라리 눈을 반쯤 뜨고 있는 버릇이 생겼다. '고1때부터 처음 사귄 남자 친구도 이것보단 키스를 잘했다. 사실 처음에는 어떻게든 키스하는 버릇을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키스 시간이 너무 짧아 그냥 참기로 했다. 현호 선배에게 키스는 지금 시작한다, 는 것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단계고 과정일 뿐 알맹이는 별 의미가 없었다. '딱딱한 청바지 안으로 힘겹게 손을 밀어 넣은 현호 선배가 자신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안에 것이 이미 다 서 있었다. 전화 네 통을 할 때는 뭔가 욕구가 쌓여 있다는 증거긴 했지만 좀 놀랐다. 선배가 내 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게 나름 유일한 전희인데 사실 바람은 의도치 않게 토해지듯 슬쩍 들어와야 좋은 거지 이렇게 대놓고 불고 있으면 마치 호빵이 귀 근처에 있는 느낌 밖에 안 나서 별로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영화 화면을 봤다. 얼굴에 분장을 한 조커가 why so serious? 라고 말하고 있었다. 허스키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건조한 목소리와 그 말이 매우 잘 어울렸다. 목이 아파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어두운 녹색 소파가 보였다. 졸음이 밀려왔다. 어제 새벽까지 공부했고 오늘은 수업도 많은 날이었다. 게다가 학원에서 애들의 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