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운명의 날.

두진의 오늘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는 없었다. 다른 날과 달리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번쩍 눈을 뜬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소풍 가기 전날의 들뜬 아이처럼 두진은 밤잠을 설쳤다.

화장도 제법 공들여 했고 옷도 신경 써서 골라 입었다. 인턴 생활 내내 질끈 동여맸던 머리도 풀어 살랑거리게 만들었다. 얼마 만에 해보는 인간다운 모습인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두진이 감격에 겨워했다.

“아. 이거지, 이거. 역시 여잔 꾸며야 해. 완전 여신 강림.”

자화자찬을 하고 나니 살짝 민망해져 두진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파이팅을 외쳤다.

“아자! 아자!”

방을 나서자 아직 잠에서 덜 깬 엄마가 식탁에 머리를 대고 누운 채로 두진을 돌아봤다.

“벌써 가려고?”

졸린 티가 역력한 목소리로 겨우 물으며 두 눈을 가물거리는 엄마를 보지도 않고 두진이 곧장 현관으로 걸어갔다.

“일찍 일어난 새가 모이도 먼저 먹는다잖아. 부지런한 모습 보여야 점수도 더 잘 받지 않겠어? 엄만 더 자.”

또 글 쓰느라 밤을 샌 모양이다. 평소에도 잘 차려 주지 않던 밥을 오늘 아침 굳이 챙겨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밥은커녕 살아서 주방까지 걸어 나온 게 용할 정도였다. 두진은 좀비 엄마가 차려 주는 아침밥을 먹고 면접장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밥을 과연 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기다리다 해 넘어가지.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미련 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두진의 뒤로 엄마가 혼잣소리를 중얼거렸다.

“요즘 바뀌었어.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제일 먼저 잡아먹힌대……. 음냠.”

집을 나온 두진은 시야를 자극하는 햇살을 손을 들어 피하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날씨 한번 기막히게 좋고. 어쩐지 오늘 예감이 좋은데?”

나이 서른에 어울리지 않는 발랄함을 선보이며 두진이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자신을 실어다 줄 버스가 보이자 두진이 걸음에 스피드를 더했다. 간신히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았을 때만 해도 두진의 기분은 하늘을 날 듯이 좋았다.

딱 그때까지는 그랬다.

“마왕이다.”

면접을 보기 위해 대기 중이던 두진이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 확실히 오늘은 그녀에게 굿 데이였다. 두진은 힐끔 눈동자만 움직여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했다. 신경 정신의학과. 마왕의 구역인 흉부외과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거나, 사람을 착각했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두진은 생각했다. 자박자박. 수많은 발소리 중에 유독 두진의 귀에 착착 감기는 소리가 있었다. 트레이드마크인 새하얀 스니커즈를 신은 마왕의 발소리였다. 구두 소리도 아니고 운동화가 내는 작은 소음을, 그것도 단 한 사람의 발소리만 어떻게 감별이 되느냐고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희한하게도 두진의 귀에는 명확하게 구분이 되고 있었다.

마왕이 자신의 선배가 된 이후 줄곧 그래 왔다.

‘설마. 설마. 아니야. 그냥 지나가는 거야. 그럴 리 없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에 두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리질을 쳤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하듯 발소리는 그녀 앞에서 뚝 멈췄다. 제 앞에 나란히 놓인 발 두 개를 바라보는 두진의 동공이 흔들렸다.

‘왜. 왜! 여기 아니잖아. 가. 가라고! 쫌!’

Stop 해버린 마왕의 발을 향해 두진이 열심히 ‘Go!’를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 울부짖음은 마왕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고로 그녀의 바람은 실현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일어나.”

두진의 머리 위로 마왕의 잔혹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면접 날 은총은 내리지 못할망정 왜 느닷없이 나타나 음산함을 남발하는지. 속으로 그를 향한 저주를 퍼부으며 꿋꿋이 버티는 두진의 발을 툭 하고 마왕이 건드렸다.

“귀 막혔어?”

아. 이 미친 시건방.

빠드득. 이를 갈며 마왕을 향해 독기를 품은 두진이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들끓는 속과 달리 만면에 빙긋이 억지웃음을 띠면서.

“아이쿠, 이런. 마왕. 아니, 아니. 시현 선배님 아니세요? 한데 여긴 어쩐 일로…….”

여긴 네가 싸돌아다닐 곳이 아니지 않느냐는 속뜻이 숨겨져 있었지만, 그를 마왕 시현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하긴, 안다고 해도 무시하고 제 말만 할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