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화환이 오고 가고, 흰 봉투가 오고 가고, 만들어진 미소가 오고 가는 식장.'여자들의 부러움과 시기의 눈길 끝에 한 여자가 앉아 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예쁘게 칠해진 붉은 입술을 이로 사정없이 깨물고 있었다.'“올 거야. 날 데리러 반드시 올 거야.”'여자는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듯 같은 말만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여자의 손에 의해 들린 하얀 실크장갑은 그녀의 불안한 마음처럼 흉하게 구겨졌다.'잠시 후 신부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신부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지만 이내 다시 빛을 잃고 방황했다. '“예식 10분 전입니다. 윤이진 신부님 준비 하세요.”'이진은 눈을 감았다. 입술을 깨무는 것도 장갑을 쥐어짜는 것도 모두 멈췄다. 그러자 그녀를 둘러 싼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이진아.”'다시 문이 열리고 두툼한 몸 위에 최고급 수트를 걸친 한 남자가 들어섰다. 이진의 아버지 윤재만이었다.'“이것만이 우리 회사가 처한 위기를 넘기는 방법이다. 너도 YJ건설 사람인만큼 이런 나의 선택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이진은 우리의 회사가 아니라 당신의 회사겠죠 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오늘의 결혼으로 회사가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가슴이 벅찬 윤재만의 눈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마네킹처럼 굳어있는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못 본 척 했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에겐 하나뿐인 딸보다 회사가 우선순위였다.' '윤재만에게 YJ건설은 자식이었다. 틀린 점이 있다면 그가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던 사랑과 애정을 쏟았다는 사실이다. '딸이 태어났을 때도, 그 딸의 생일에도. 심지어 자신의 부인이 숨을 거뒀을 때에도 재만이 있던 곳은 회사였다. '10년 전 자신만을 찾으며 쓸쓸히 죽은 부인이 허망하게 세상을 떴을 때에도 엄마를 잃은 딸에 대한 안쓰러움보다 자신의 뒤를 받쳐줄 아들을 낳아주지 못하고 가버린 부인에 대한 원망이 더 컸다. 그래서 재만은 자신의 뒤를 이어 줄 아들을 입양했다. 그것도 죽은 부인의 장례식 기간 중에. 그리고 그 아이에게 이제까지 알고 배웠던 모든 것을 가르쳤다. 아이는 재만의 기대보다 훨씬 똑똑하고 총명했다.'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지금 그 아들은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독일에서 유학중이다. 그러던 중 일이 터져 버렸다. 건설 비리에 연루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목숨처럼 일궈온 회사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졌다. 국세청에서는 조사가 들어오고, 직원들 사이에선 회사가 곧 남의 손에 넘어갈 것이란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회사는 벼랑에서 떨어지는 주인 없는 신발처럼 끝없이, 끝없이 추락했다. '하지만 재만은 이대로 자신의 회사가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다녀보았지만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재만의 눈에 아름답게 자란 딸이 보였다. 동시에 재만은 신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래, 이 아이가 있었어. 이 아이가! 하하하, 하하하하.”'재만은 그날 바로 이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