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 봐! 네가 왜 미안한지 그리고 왜 뻔뻔한지…….”
비록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는 피할 곳이 없을 정도로 차갑고 단단했다. 눈에 닿는 모든 걸 태워버리기라도 할 듯 뜨거운 그의 시선에 지은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대답해.”
“난…… 나는…….”
“네가 어쨌다는 거야?”
아! 지은은 자신의 팔을 아프도록 붙들고 있는 재헌의 손만 아니라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저렇게 무서운 눈빛은 본 적이 없다. 죽일 듯 달려들던 경훈의 눈빛도 저처럼 무섭고 두렵지는 않았다. 내게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내게는 저렇게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착각 때문일까.
‘그러지 마. 나한테 그러지 마. 당신이 이러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차마 입술을 열고 나오지 못한 그 말이 마른 눈물이 되어 급하게 떨어졌다.
“뭔가 착각하나본데, 똑똑히 들어! 너한테는 전재헌이란 남자 외에 남자는 없어. 어떤 일이 있었건 간에, 넌 내 여자고, 그따위 이상한 기억 때문에, 오해 같은 거 하는 거 난 용서 못 해.”
“…….”
“뻔뻔하다고 했지? 뻔뻔할 정도로 날 사랑하니? 안고 싶어 죽겠는 사람 목에 고작 키스 한 번 해놓고, 미안하다는 소리나 하는 게 사랑이니? 정말 날 원한다면 내가 주춤해도 달려들어야 하는 거 아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저 남자의 사랑 앞에 고개를 들 자신이 없다. 지은은 자신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멈출 줄 모르고 쏟아지는 장대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
재헌이 지은의 어깨를 바로 세우며 그녀의 눈을 주시하는 순간, 짧은 명령어 하나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잊으라니 뭘 어떻게 잊으라는 건가.
“나 하나만 기억해! 나 지금 몹시 화났으니까 빨리 대답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지은의 턱을 재헌이 잡아들었다.
“내 눈 똑바로 보고 대답해.”
불을 담고 있는 듯한 재헌의 눈을 향해 지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랑해.”
기다란 손가락으로 지은의 눈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는 재헌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네가 키스해.”
“…….”
“뭘 그렇게 놀라? 오늘은 네가 날 가져.”
감격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춤대는 지은에게 재헌이 다시금 채근했다. 떨리는 손으로 재헌의 얼굴을 감싸 안으며 지은이 그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갔다. 더운 입술이 가볍게 열리며 낮은 소리가 새 나왔다.
“네가 안기고 싶었던 그만큼…… 나도 너한테 안기고 싶다는 거, 잊지 마.”
‘분명히 한 축으로 기우는 사랑인데, 어쩌자고 이 남자는 내게 미안한 마음을 거두라고 말하는 걸까. 초등학교 아이들도 이익과 손해의 기본적인 셈은 할 줄 아는데, 이 남자의 사랑은 셈을 모르는 걸까.’
그의 품에 안긴 순간, 풀린 긴장처럼 다가온 그리움에 입을 맞추고는 화들짝 놀라는 그를 보며 거절이라는 아픈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화를 내면서까지 그 오해의 무용함을 알려주고 있다. 삶이 휘청거릴 것 같은 아픈 기억조차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덮어주는 그의 사랑에 그냥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남자의 눈빛을 믿으면, 거짓과는 무관한 이 남자의 가슴을 믿으면 거기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길 하나가 모일 것 같다. 적어도 이 남자를 사랑하고 싶은 내 마음을 감추지만 않는다면 그 길에 발을 디딜 수 있을 것 같다.
힘겨운 고백을 시작하듯 지은이 두 손으로 재헌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그의 입술을 가만히 훑었다. 촉촉해진 입술을 헤집고 들어가 마중 나온 그의 혀를 반갑게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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